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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나는 살해당했다 #9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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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도화. 사람 이름인가? 아니면 단순히 복숭아꽃? 기분이 묘하다. 내가 왜 이 두 글자를 거울에 썼는지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소리 내어 읽는 순간 이상하게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대체 뭘까. 이 부조리한 감각은.

“여보, 뭐해? 당신 그러다가 정말 지각해. 다 씻었으면 얼른 나와서 밥 먹어.”

밖에서 아내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생각을 멈추고 욕실에서 나갔다. 어차피 지금은 아무리 궁리를 해봐야 답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주방으로 가니 아내가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쏘아봤다. 아내는 기다리는 걸 잘 못하는 성격이다.

“미안.”

식탁에 앉으면서 아내에게 사과했다.

“샤워를 하는 것도 아니고 뭘 그리 꾸물거리니.”

“미안해.”

나는 다시 사과하고 수저를 들어 된장찌개 국물을 떠먹었다. 아내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내 평가를 기다렸다.

“어때? 안 짜?”

“맛있네.”

“그게 끝?”

아내는 실망했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끝내주게 맛있어. 역시 당신 음식 솜씨는 최고야.”

비로소 아내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내는 인사동에서 수십 년 동안 한정식 전문식당을 운영하는 장모만큼은 아니지만 음식을 꽤 잘하는 편이다.

“참. 장모님께 여쭤봤어?”

나는 밥을 한술 뜨며 슬쩍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일부러 아내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면 말문이 막힐 것 같았다.

“아니, 아직.”

아내가 고개를 저었다.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왜?”

“흐음. 엄마도 여유가 있진 않아. 요즘 경기도 안 좋잖아. 식당도 예전처럼 잘 되는 것 같지도 않고.”

“하지만 지금 상황이 그렇잖아.”

갑자기 모래가 씹히는 기분이 들었다.

“알아. 그래도 매번 엄마한테 손을 내밀 순 없어. 잊었니? 이 집, 누가 해줬는데? 사실 대부분 엄마 돈이잖아.”

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아내를 똑바로 쳐다봤다. 오히려 아내가 고개를 돌린다.

“지금 그런 이야기가 왜 나와. 그리고 내가 그걸 모른다고 생각해? 나도 지금 방법이 없으니까 이러잖아. 오죽하면 장모님께 손을 벌리겠어. 이번 한 번만이야. 이 고비만 넘기면 앞으론 그럴 일 없을 거야.”

아내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금액이 너무 커서 솔직히 잘 모르겠다. 엄마가 해줄 수 있을지.”

“재작년인가 장모님 인천에 아파트 사지 않았어? 지금쯤 꽤 올랐을 텐데…….”

나는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가 수저를 탁 내려놓으며 사납게 쏘아봤다.

“뭐? 그 아파트 팔아서 돈을 마련해달라고 얘기하라는 거니? 당신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엄마가 그 아파트를 왜 샀는데? 진짜 몰라서 그러는 거야. 진짜 뻔뻔하다.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오니.”

장모는 결혼하고 겨우 다섯 해 만에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깐깐한 시어머니 밑에서 아내와 처제, 두 자매를 홀로 키웠다. 지금 운영하는 식당도 시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시어머니, 그러니까 아내의 친할머니는 여든두 살까지 장수하다가 3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장모가 자신만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게 얼마 되지 않았다.

“당신, 진짜 너무한다.”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알았어. 미안해. 미안하니까 이 얘긴 그만하자. 늦었네. 출근할게.”

옷을 입으려고 식탁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가자, 아내가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뒤따라왔다.

“뭐야. 난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

“됐어. 그만해. 나도 충분히 알아들었다고.”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아내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니?”

“아냐, 그런 거.”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누그러뜨리고 말했다.

“아니긴. 화내고 있잖아.”

“정말 미안해. 이야기, 퇴근하고 와서 다시 하자. 나 정말 늦었어.”

넥타이도 건성으로 매고 가방을 들었다. 그대로 방을 나가려는데 아내가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아내를 똑바로 쳐다봤다.
아내는 뭔가 이야기하려다가 생각을 바꿨는지 말없이 넥타이를 고쳐 매주었다.

“저기…….”

“됐어. 늦었잖아. 얼른 출근이나 해. 엄마한테는 내가 잘 말해볼게. 대신 이번이 정말로 마지막이야. 엄마도 돈 없어. 혜진이도 시집 보내야 하고. 곧 날을 잡을 거라더라. 그럼 엄마도 빠듯할 거야.”

그러고 보니 최근에 처제의 혼담이 오가는 중이다. 나는 착잡해져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알아. 그래서 미안한 거고.”

“알면 됐어.”

아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나는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오늘따라 발걸음이 무겁고 가슴이 갑갑했다. 뭔가 콱 막힌 기분이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타고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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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진짜로 미치겠네. 장모가 안 해주면 정말 막막해지는데. 그 많은 돈을 어디서 마련하지.”

살아보니 그렇다. 모든 문제는 항상 돈에서 비롯된다. 물욕이 과하면 안 된다는 식의 도덕군자 같은 소리는 다 개소리다. 돈이라는 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내 수중에 돈이 많았다면 이렇게 골머리를 앓지 않았을 것이다.

“모르겠다. 일단 출근이나 하자.”

중얼거리며 액셀을 밟으려는데 갑자기 시커먼 그림자가 시야를 가렸다. 깜짝 놀라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뭐, 뭐, 뭐야.”

나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체구가 건장한 사내들이 내 차를 가로막고 있었다. 하나같이 맞춤옷처럼 검정색 정장을 걸치고 있는 데다가, 머리도 해병대처럼 빡빡 밀어서 무척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특히 나를 노려보는 눈빛에 살기가 어려서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려들었다.
사내들 중에 낯이 익은 한 사람이 실실 웃으면서 다가오더니 앞 유리창을 노크하듯 톡톡 두드렸다.

“아이고, 강 대리님. 이제 출근하십니까?”

미소를 짓고 있지만 나를 쳐다보는 눈빛은 전혀 웃지 않았다. 뒤쪽에 서 있는 사내들과는 달리 모델처럼 늘씬한 체형에 곱상한 외모이지만 결코 마음을 놓을만한 상대가 아니다. 오히려 뒤쪽의 덩치들보다 더 위험한 남자다.

차영광.
명함에 박혀있기로는 실장이라는 직책까지 있어 회사의 중역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부 업체에서 일하는 조직폭력배다.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아, 안녕하십니까. 차 실장님.”

나는 차창을 내리고 가까스로 목소리를 내어 그에게 인사했다.

“저야 간절하게 안녕하고 싶은데 말이죠. 강 대리님 때문에 안녕하지 못하니 진짜 미치겠습니다. 아니, 그리고 제 전화는 왜 자꾸 씹으십니까? 서운하네요. 우리가 그런 사이였습니까? 강, 대, 리, 님?”

“아닙니다! 정말 아니에요. 차 실장님. 그건 오해십니다. 제가 일부러 전화를 피한 건 아니고요. 그게 그러니까…….”

나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뒤쪽에 있던 차 실장의 부하 하나가 예고도 없이 야구방망이로 앞 유리창을 내리쳤다. 그 바람에 유리창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일어났지만 나는 찍 소리도 내지 못했다.
빌어먹을, 아직 할부도 끝나지 않은 새 차인데.

“야, 야. 무식하게 뭐 하는 짓이야. 그러니까 우리가 깡패 소리를 듣는 거잖아.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러면 안 돼. 품위를 좀 지켜라.”

차 실장이 짐짓 점잖은 투로 부하를 타일렀다. 아마도 미리 지시를 내렸겠지. 그래야 내가 겁을 먹을 테니까. 지금 그는 시치미를 떼고 있는 거다.

“죄송합니다.”

야구방망이를 휘둘렀던 사내는 내가 아닌 차 실장에게 공손히 사과를 하고 뒷걸음으로 물러섰다.
차 실장이 다시 웃는 얼굴로 내게 고개를 돌렸다.

“아이고, 이걸 어쩌나. 아침부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애가 잘못했으니 수리비는 제가 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지갑을 꺼내 만 원짜리 지폐 몇 장을 차 안으로 뿌렸다. 지폐들이 팔랑거리며 여기저기 흩어진다.

“내가 또 셈은 정확한 사람이거든요.”

차 실장이 피식 웃으면서 톡톡 지붕을 두드렸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 대리님, 나는 말이죠.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이 정말 싫어요. 우리 사이에 사소한 문제로 금 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강 대리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아,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렇죠? 역시, 우리 강 대리님은 사나이라니까. 잘 아시겠지만 약속한 날이 며칠 안 남았습니다. 강 대리님은 저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거 아주 잘 알아요. 그렇죠? 저는 누구보다 강 대리님을 믿고 있어요. 이건 뭐 그냥 노파심에 하는 이야기인데요. 꼭, 정말로 꼭 약속을 지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착각일까. 차 실장의 눈이 기이한 빛을 발했다. 나는 그 서슬에 눌려 목이 떨어질 정도로 세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요, 좋아.”
차 실장이 흡족하게 웃었다.

“기한은 꼭 지키겠습니다.”

나는 쥐어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강 대리님을 믿고 이만 물러갑니다. 출근 잘 하시고요. 혹시라도 수리비가 모자라면 말씀하세요. 요즘은 또 세상이 편리해졌다는 거 아닙니까. 바로 폰뱅킹으로 쏴 드립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에헤이, 내 성의를 또 무시하면 섭섭하지요.”

차 실장이 입술을 실룩거렸다.

“아, 그러면 혹시라도 부족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꼭입니다?”

“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비굴할 정도로 몇 번이고 고개를 조아렸다.

“역시 맘에 들어. 그럼 또 봐요, 강 대리님. 야야, 뭐 하냐. 대리님 출근하시는데 빨리 길을 열어드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앞을 가로막고 있던 건달들이 홍해의 기적처럼 좌우로 갈라졌다.
차 실장이 빙글빙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말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차 실장과 그의 부하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묵묵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이대로는 출근하고 싶지 않다. 회사에는 거래처를 다녀오겠다는 식으로 적당히 핑계를 대고 늦게 나가면 된다.
뭔가 해소할 거리가 필요했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망설임 없이 번호를 불렀다. 조금 이른 시간이기는 하지만 당장 이 기분을 해소하지 않으면 미칠 거 같았다.
컬러링으로 설정한 팝송이 두어 소절 흐르다가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어, 나야. 아직 자고 있었던 거야. 그만 일어나. 얼굴 봐야겠어. 늘 만나던 거기로 와. 알아, 이른 시간인 거. 토 달지 말고 당장 와. 알았어?”
상대가 잠시 망설이더니 곧 알았다고 대답했다.

“올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빨리 와.”

나는 통화를 마치고 전화기를 조수석으로 던졌다.
액정에 수신번호의 사용자 이름이 잠시 머물다가 사라졌다.

‘이쁜이 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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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창작그룹 <화담>대표.
소설가,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등

주요 출간작 >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카르마,
우리가 연애를 하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웅진 시작), 한국 환상문학단편선(웅진) 기획 및 작품 수록
영화소설 '열한 시', '또 하나의 약속', '수상한 그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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