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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각하 그런말 하면 어쩝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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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대통령 특별동차에서 나눈 국회의장선거파동 얘기는 대통령의 한마디로 아주 어긋나 버렸다. 정씨의 회고.
결론이 어쩌다가 그런식으로 나버렸는지 모르겠어.『그까짓 야당 40표 얼마든지 제표로 끄는 방법이 있지요』라는 대통령의 말에 나는 놀랐어. 공화당의원이 1백8명인가 됐는데 50표가 지지한다. 아마 의장선거때 50대60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 50표가 절대적인 사병이라는 말인지, 대통령의 정견 혹은 다른 여러 가지 정치적 이해관계가 같아서 자기를 지지한다는 것인지 몰라도…. 「그까짓 야당 40표 내 정견을 따르도록 하는데 자신 있다」는 말은 중대한 얘기야. 이거 아주 위험한 사고예요. 이것이 아마도 낮에는 야당이고 밤에는 여당이라는 말이 생겨난 원인이 거기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날같이 섭섭한 때가 없었어요. 그 양반이 사리를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그러는거야. 그게 서운하고…. 대통령이 이런 말도 할 수 있다면 앞날의 정치가 불행해 지겠다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 내가『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대정당을 이끌어 가시는 각하의 말씀이 아닙니다.』 단호하게 그렇게 말했어요. 내 심정이 극도로 혼란스러워 어떻든 좀 거북한 장면이 되고 말았어.
좀 있다가 내가 말했어요. 『제명론에 대해 당명을 거부했다, 항명했다 해서 신문들까지도 항명파동이라고 말하는데 그 점은 각하의 명령이 당의 명령으로 되는데… 민주적 사고방식은 제쳐놓고 말한다해도 반드시 제명을 해야 한다는 말씀은 거두십시오. 극단적인 제명 운운하는 것은 피하고 한달이나 두달 동안 정권처분 그 정도로 하셔도 각하의 위신은 충분히 유지되고 또 각하께서도 너그러이 관용으로 임하신다는 이미지를 당원들에게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점 충분히 생각하시고…. 사실 이 사태가 내 자신으로 인해서 생겨났다는 생각도 들고 해 사건이 확대되어 희생자가 난다는 것이 내게도 고통스런 일입니다.』 내가 그렇게 말했어. 대통령도 좀 심한 말을 했다 싶었는지『선생님 마음도 이해합니다』고 하더군. 서울에 온 뒤에 결국 보니까 제일 중벌이 3개월 정권이 되긴 하더군.
좀 다른 얘기 하나 해야겠어. 이건 국회의장선거 같은 것과는 관계없는 일이고 내 사사로운 감정일수도 있지만 정치분위기라고 할까, 그런 것하고 무관하지 않아. 참고로 말하는 거야.
그날 섬진강 댐 낙성식 현장에서 내가 당한 봉변이야. 둑 아래서 낙성식을 하고 끝나니까 대통령을 비롯한 내빈들이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요. 서쪽산 중턱까지 올라가 거기서 댐 제방을 건너 동쪽 산 끝에 가면 큰 호수가 산속으로 펼쳐진 것, 발전시설, 이런걸 한눈에 볼 수 있어. 서쪽 산아래까지 갔던 자동차들은 모두 동쪽 끝으로 돌아가 대기시켜 놨어. 그쪽에 가서 자동차를 타고 임실역에 나가도록 돼있는 거야. 나는 그걸 몰랐는데 별수 없이 동쪽으로 모두 걸어가야돼. 대통령을 위시해서 모두 젊으니까 잘들 오르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어. 내나이 73세인데다 천식까지 있고 험한 시골길조차 몇년동안 걸어본 일이 없었거든. 내가 애는 쓰지만 못오르니까 교통장관 안경모군하고 임실출신 한상준의원 등이 나를 부축해 오르는 거야. 그렇지만 내가 워낙 힘이 .없으니 대통령일행에 처지는 거야. 10분도 못돼 대통령은 저만큼 올라갔고 교통장관이나 한군은 대통령 곁에서 설명도 해야하니까 날 두고 가라고 했어요. 그리곤 젊은 사람들이 부축해 올라가는데 내가 간신히 동쪽끝에 도착하니까 대통령은 벌써 10분전에 떠났어. 내가 탈 승용차 하나만 덩그런히 기다리고 있고….
70이 넘은 노인을 초청했다면 미리 얘기가 있었어야지.「산길을 오르게 되어 있는데 힘겹겠다고 생각되면 서쪽에 차를 대기시켰다가 바로 임실역으로 나가는게 좋겠다.」 적어도 전북지사나 이후락비서실장중 한사람은 나에게 그런 귀띔이나 배려를 해야했어. 오죽했으면 안교통장관까지 분개해 가지고『얼마뒤에 저희가 주관하는 행사가 있는데 그때는 이런 고생 안하도록 모시겠읍니다』고 해.
벌써 이때부터 오직 한사람만이 소중하다는 폐습이 생긴거야. 공화당안의 여러사람들, 정부나 각 지방관리들이 1인 지상주의로 나가는 양상이 그때 이미 현저히 나타나기 시작한 거야.
그런데 비슷한 얘기니까 얘기하는 건데 기막힌 일이 또하나 있었어. 그해 겨울이야. 아마 그 이름이 경북 북부선이든가 예천∼문경간 철도선이 부활되어 개통식을 하게 되었어. 안경모교통장관이 섬진강댐때 일을 잊지 않고 전화를 해왔어.『참석해 주시면 모든 편의는 유의하겠읍니다』고해. 그래 참석하겠다 해가지고 대통령특별동차에 함께 타고 갔어요. 대통령·교통장관하고 테이프도 끊고 망치로 침목의 못질도 하고 그런뒤 간단한 개통식이 있어. 철로변 광장에 연단을 만들어 천막을 쳤는데 40명 넘게 자리가 마련된 훌륭한 연단이더군. 대통령치사, 교통장관 인사, 이런 것이 있게 되는데 참 놀란 것이 내자리가 뒷줄이야. 종래 공식적인 장소에 나가면 대통령 옆자리는 국회의장이나 총리가 나오면 그분들이 앉고 그렇지 않을 경우 내가 우선적으로 앉던게 관례야. 그런데 그날은 대통령 왼쪽은 안교통, 오른쪽은 이후락비서실장이 앉도록 해놓았어. 거기다 얄밉다는 건지 내자리는 이후락의 바로 뒷자리에다 지정을 해놨어요. 이건 고의적으로 나를 욕보이려는 자리배치야.
교통장관이 이런짓 했을리 없고 아마 비서실·경호실 이런데서 내가 대통령과 자주 어울리는게 싫다해서 그랬겠지…. 내가 그 뒤로는 공식 행사에 안나갔어. 내가 나갈만한 공식행사일 때는 미리 좌석배치를 알아보고 실례가 없으면 나가기로 하고…. 어쨌든 비서실문제·국회의장 선거여파, 그런 것 때문에 임실과 예천행사의 그런 부작용이 있었지. 1인 주상주의가 대통령 개인과의 친목관계까지 연관이 되어 배려가 된단 말이야. 그러니까 참석하는 사람은 그 사람대로 여기 신경을 쓰고 주최하는 쪽도 이걸 갖고 어떤 획책까지도 하려니 또 신경을 쓰고… 이런 풍토가 민주주의가 제대로 안되는 정치풍토의 단면이라서 내가 얘기를 하는 거야.
얘기가 좀 빗나갔지만 내가 대통령의 3선 개헌을 경고한 것이 이런 분위기 탓이야. 공화당이 무력해졌어. 김종필은 내가 당의장을 내놓은 6개월 뒤에 당의장으로 복귀를 했지만 그전과는 달랐어. 실권이 없어. 소위 공화당 간부라는 사람들이 이후낙과 김형욱 등 대통령 측근들의 그늘에서 김종필을 견제해. 행정권력이 집권여당을 지배하는 거야. 민주주의라는게 정당정치라야 하는데 공화당이 집권의 주체도 아니고 중심도 아니야.
대통령이 63년3월 나한테『71년 선거에 저는 안나가겠읍니다』라고 했을때 이것이 내가 3선 개헌 경고를 한데 대한 회답이고 그래서 반가우면서도 왜『3선 개헌 안하겠읍니다』라고 안하나, 좀 서먹한 생각이 든 것도 2년전부터 이런 1인 지상주의 풍토가 자라왔기 때문이야.
그날 대통령과의 면담이 있고 2주일쯤 지난 3월 하순부터 대통령 서거운동이 시작됐어. 나는 소위 원로 멤버지. 원로반이라는건 김종필이 중심이 된 당의 최고간부 반이야. 주로 연설은 그 양반이 하고 나는 필요한 때 몇 군데서만 띄엄띄엄 연설에 참가했지.
나는 장시간 연설은 못해. 이미 노쇠하고 변술도 없고…..
선거전 제1차 유세는 경기도북부지역 고양-파주-포천-가평 등이야. 내가 보기로는 김종필씨가 말을 잘해. 웅변이라기 보다 미변이야. 조리있게 말하고 특이한 매력이 있는 화술이야. 어디를 가나 인기를 끌었어. 청중이 예상보다 많아. 파주같은 시골인데 7천∼8천명이면 굉장한 것이야. 연단에 앉아서 청중들이 듣는 자세를 보면 말이 받아들여지는지 아닌지는 짐작이 가요. 여러차례 해보니까 그런 것도 느낌이 와. 내가보기엔 성공적인 편이야. 그런데 기이한 일이 일어난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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