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서울 S호텔에서는 해외 전문가들이 참석한 인문학 포럼이 열렸다. 오전 회의는 잘 진행됐지만 점심때가 되자 돌연 분위기가 머쓱해졌다. “김영란법에 해당되는 참석자들은 다른 방으로 옮겨 달라”는 안내가 흘러나온 탓이다. 외국인과 일반인들은 고급 도시락을 즐겼지만 교수·기자 등 50여 명은 음식 종류를 확 줄인 3만원 미만 뷔페로 점심을 해결해야 했다. “마음이 무척 불편했다”는 게 참석했던 한 유럽 외교관의 고백이다.
다음달 중순 독일에서 한·독 학술대회를 여는 국내 단체도 고민에 빠졌다. 만찬을 계획했지만 높은 현지 물가로 3만원 이하 식사가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올바른 방향의 규제지만 김영란법 시행 후 가늠 못한 문제가 곳곳에서 속출하고 있다. 특히 김영란법 해당자와 외국인들과의 만남은 여간 거북한 게 아니다.
이를 내다본 외교부는 지난달 25일 진작 ‘김영란법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외교 행사에서는 음식물 가액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게 골자다. “액수 제한이 외교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한데 여기엔 “외교관 등 공직자일 경우”라는 묘한 단서가 달려 있다. 학자·언론인·민간단체 관계자 등은 안 된다는 뜻이다. 각국 대사관 행사에 외교관만 부르라는 얘기와 다름없다. 시민사회와의 교류를 중시하는 공공외교가 각광받는 요즘이다. 그런데도 공직자와의 채널만 터주겠다니 이런 시대착오가 없다.
한 외국 외교관은 “해외 한국대사관 직원은 누구든 거리낌 없이 만나면서 국내 외교관에겐 제한을 가하는 것은 명백한 불평등”이라고 분개한다. ‘베트남전의 기획자’로 통하는 로버트 맥나마라 전 미국 국방장관이 11가지의 패전 원인을 꼽은 적이 있다. 그중 결정적인 게 “베트남에 대한 무지로 적과 친구를 잘못 판단했다”는 것이었다. 남베트남 고위층에게만 귀 기울이다 바닥 민심을 놓쳤던 거다.
미국이 베트남 민심을 제대로 알았던들 진작 전쟁을 끝냈을 게다. 요즘 북핵·위안부·사드 등 주변국도 얽힌 민감한 현안이 한둘이 아니다.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놓고 정부 입장과 일반 대중의 인식 간에 큰 괴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도 외교관 이야기만 듣게 되면 한국 사회의 정서를 오해하고 이로 인해 엉뚱한 대책이 나올 수 있다.
공직자만 만나라는 건 ‘외눈박이 외교’를 강요하는 꼴이다. 한쪽 눈으로만 봐 편견을 갖느니 아예 못 보는 게 낫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