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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질곡」떨치고 "자유햇살"가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파판드레우」는 조국을 소련에 팔아 넘겼다』
『미국의 지배로부터 그리스를 되찾아준것은 PASOK의 승리!』
『수상실, 농민지원책 강화결정』
『임금동결 항의, 근로자 파업속출』
그리스 국회의사당앞 신타크마(헌법) 광장 신문가판대에서 보이는 20여개 신문들의 각기 다른 현란한 제목들이 에게해의 햇살만큼이나 눈을 어지럽힌다.
오랫동안의 군사독재에 억눌렸던 언론들이 그동안 묵은체증을 씻어내려는 것일까, 제목들이 자못 자극적이다.
아테네 관광객이 으레 한번은 찾게 마련인 신타크마광장에 들어서던 날 정부의 시책을 비판하는 조그만 시위행렬에 부닥쳤다. 민주화과정에서 겪고있는 이나라의 진통이 물씬 코를 스치는 것같다. 그 독재가 지배하던 7년동안 텅 비어있던 이 광강이 요즈음은 붐빈다는 안내자의 얘기다. 선거가 있을 때는 1백만명넘는 인파로 뒤덮여 이지상에 민주문화를 맨처음 가꾸었던 고대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시절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요즘의 그리스정국은 집권자의 횡포와 야당의 극한투쟁이 엇갈리는 혼미한 얼굴로 투영된 가운데 긴장감 마저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1백년 역사를 지닌 브라디니 신문사의 「아사나·시아디스」 정치부장(47)은 『집권당과 야당이 파국으로 치닫는 대결을 벌이다가도 이 광장에 나서면 대중을 증인으로 하여 타협의 길을 찾거나 그들로부터 심판을 받는 참다운 민주주의를 그리스는 되찾았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언론들이 지나치게 편향적보도를 한다고 해서 우려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자유에 굶주린 뒤의 일시적인 과욕일 뿐 독자들에게 해를줄 정도는 아니며 국민들의 분별력도 상당히 높아져 별 문제는 없다』고 그는 자유언론을 찬양했다.
그리스의 정치풍토나 시민들의 생활은 유럽식이라기보다는 아시아의 어느 나라와 흡사한 면이 보였다.
지난해 6월의 총선에서 뚜렷한 여촌야도현상을 보인것이라든가, 아테네 거리의 흔한 택시합승, 그리고 미국대사관앞의 비자신청인파가 그렇고, 공항에 들어오면서 5백달러 이상의 외화는 의무적으로 신고하도록 한것도 전혀 서구답지 않았다.
그리스가 군사독재의 질곡에서 벗어난지 12년, 그리고 EC(유렴공동체)회원국이 된지 만 5년째. 그러나 정치는 아직 선진국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경제 또한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다.
67년과 73년 두차례나 쿠데타를 일으켰던 군부가 74년 민간정부에 정권을 넘겨준 후로는 다시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고 사상 처음으로 좌·우파간의 정권교체가 평화적으로 이루어지는등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비해 비교적 순탄한길을 걸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는 여 야간의 갈등이 심각해지고 잇단 경제정책시행의 실패, 미·소사이의 줄타기 외교등으로 어려운 정국을 맞고 있다. 85년의 의회선거에서 집권당인 전그리스 사회주의운동(PASOK) 이 8l년에 이어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으나 아테네등 도시지역을 석권한 신민주주의당(NDP)은 그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있다.
더구나 이에 앞서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는 「파판드레우」 수상이 오랜 민주화투쟁으로 국부라 할만한 「카라만리스」 전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확약해놓고 투표직전에 이를 번복하고 공산당과 합세하여 그를 쫒아냄으로써 정치적 신의문제에 의문을 던지게 하고 있다.
「파판드레우」는 이러한 공약을 무시했을뿐 아니라 국회해산권과 계엄선포권·국민투표실시권을 대통령에게서 빼앗아 수상권한을 강화하기도 했다.
그래서 장기집권 야욕으로 역사를 되돌리려는 음모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이같은 우려는 첫번째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기 직전인 65년의 정치적 상황을 염두에 둔것이라고 할수 있다.
우파가 권력을 독점하던 당시 「파판드레우」 수상의 아버지가 그시절로서는 좌경이라고 할수있는 중도정부를 수립하자 극우파세력의 반발을 받았다. 게다가 공산세력의 침투로 정정이 더욱 불안해져 결국 군사독재로 이어지는 67년4월의 쿠데타를 불러오게 됐던 것이다.
그리스는 그후 6년만인 73년11월 제2차 쿠데타가 발생, 「키즈키스」육군중장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다음해 터키와의 사이에서 빚어진 키프로스분쟁때 이를 제대로 수숩할 능력이 없자 파리에 망명해있던 반독재운동지도자 「카라만리스」를 불러들여 정원을 넘겨주었다.
민주주의 신봉자였던 「카라만리스」는 우파인 신민주주의당을 기반으로 77년 총선에서도 승리, 2차례의 수상을 거쳐 80년4월 대통령에 선출됐고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복귀(80년10월)와 EC가입(81년1월)을 실현시키는 등 친서방정책으로 국가발전을 꾀했다.
그러나 두차례의 오일쇼크를 겪는 과정에서 경제운영에 실패한 그는 81년10월18일 총선에서 유럽의 사회주와 바탕을 탄 「파판드레우」의 RASOK에 패배해 그리스 민주화이후 첫 평화적 정권교체를 하게 됐다.
「파판드레우」정권은 인풀레·독과점체제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배경으로 집권, NATO및 EC로부터의 탈퇴, 미군기지 철수, 산업의 사회화를 통한 경제재건을 내세웠다.
특히 83년6월에 채택한 산업의 사회화법안은 프랑스나 포르투갈의 사회당정부가 실시한 국유화나 다름없는 것으로서 국영기업외의 사기업에는 대출을 금지시켜 경영난에 빠진 기업을 국가가 인수하는형식으로 35개기업을 떠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침체는 계속돼 「파판드레우」정부는 지지기반의 하나인 좌파의 노동조합으로부터도 파업등 심한 반발을 사고있다. 이같은 상황으로 볼때 그리스 경제는 「파판드레우」현 정부의 「아킬레스 힘줄」이라고해도 과언은 아니다. 오히려 같은 굴레를 쓰고 물러난 「카리만리스」 때보다 몇겹 더 무거운 꼴이 된셈이다.
「파판드레우」정부가 공약과달리 이처럼 자신의 정권유지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자 반대파들은 『어제는 사회주의자, 오늘은 자본주의자 그리고 내일은 공산주의자』라는 비판을 퍼붓고 있다. 그의 2기집권이 불과 한해를 넘겼지만 국민들은 또다시 신타크마광장의 대결을 기대하고있는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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