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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로 환생한 햄릿, 그것도 대한민국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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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무대엔 연극 ‘햄릿’을 연습하는 학생이 모여 있다. 난데없이 난상토론이 벌어진다. “솔직히 이거 완전 막장이잖아요. 아버지는 삼촌에게 죽고, 엄마는 삼촌이랑 결혼하고…. 그냥 다 미친 사람들 같아요.” 옆 학생이 거든다.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요, 이걸 왜 명작이라고 하지? 어디서 너무 많이 본 이야기잖아요.” 반박이 이어진다. “그건 셰익스피어에 대한 모독입니다. 햄릿은 인간의 양심을 지키려는…” 허공을 가르는 말들, 그리고 침묵. 이때 누군가 일어선다. “우리가 너무 크게 생각하는 거 아닐까요. 햄릿은 내가 될 수 있잖아요. 꿈꾼다고, 다 실천할 수는 없구나. 누군가는 이러더군요, 햄릿은 인간의 목소리로 신의 노래를 부르는 고독한 전사다.” 장면을 보고 있자니 이만한 인문학 수업이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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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함익'에서 여주인공 함익으로 나온 최나라(왼쪽)와 그의 분신을 연기한 이지연. [사진 서울시극단]

연극 ‘함익’(작 김은성, 연출 김광보)은 셰익스피어 ‘햄릿’의 한국 버전이자 여성 버전이다. 여주인공 함익은 재벌 2세로 영국서 연극을 전공한 대학교수다. 일상은 화려하나 20년전 자살한 어머니가 아버지와 새어머니에 의해 살해됐다는 의심을 품고 있다. 멍든 그 앞에 의욕 넘치는 복학생 연우가 등장한다. 연우를 통해 함익은 삶의 동력을 찾고, 급기야 연극 ‘햄릿’처럼 극을 활용한 풍자로 가족에게 한방 날리려 한다. 과연 복수는 성공할까. 연극은 쫀쫀하다. 런닝타임 90분이 언제 지나가는지 모를 만큼 속도감이 있다. 무대 전환은 무려 26번. 특히 이중 설정이 돋보인다. 겉은 재벌가의 치정극을 연상시킨다. 우리가 TV드라마에서 숱하게 봐왔던 그 구조다. 하지만 그 안은 ‘햄릿’의 우유부단함을 연상시키는, 함익의 번민으로 점철된다. 김은성 작가는 “햄릿에서 비롯되었지만 전혀 새로운 플롯 안에서 햄릿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관객은 ‘함익’을 통해 지금껏 놓쳤던, 혹은 어려웠던 원작 ‘햄릿’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길 듯싶다. 다만 극중극에 나오는 힙합과 ‘헬조선’ 등은 조금 뜬금없어 보였다.

셰익스피어 원작 한국 버전 ‘함익’
속도감 있는 전개로 90분이 훌쩍

연우를 연기한 윤나무는 존재감이 강했다. 올해는 세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햄릿’이 올라갔다. 그중 첫손에 꼽아도 손색없을, 신선한 시각이었다. 16일까지 세종M씨어터.

최민우 기자 minwoo@joomgam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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