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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자 기업의 코스닥 입성 길 열린다는데…

중앙일보

입력

 
적자를 내는 기업도 성장성이 크다면 코스닥시장에 입성할 길이 열린다. 일명 ‘테슬라 요건’이 연내에 신설된다.

금융위원회는 5일 이러한 내용을 골자로 하는 상장·공모제도 개편 방안을 발표했다. 지금까진 이익을 내지 못한 적자기업은 코스닥시장에 일반상장하는 게 아예 불가능했다. 국내 증시는 상장기업의 도산으로 투자자가 피해를 보는 일을 막기 위해 매출과 이익이 있는 기업 위주로 엄격한 재무적 잣대를 적용했다.

이번에 새로 추가되는 테슬라 요건은 적자기업도 시가총액·매출액·주가순자산비율(PBR) 등이 일정 기준을 충족하면 일반상장 심사를 신청할 수 있도록 문턱을 크게 낮췄다. 구체적으론 시가총액이 500억원 이상이면서 ▶매출액 30억원 또는 2년 평균 매출증가율 20% 이상이거나▶PBR이 공모가 기준으로 200% 이상인 경우다.

금융위 박민우 자본시장과장은 “시가총액이나 PBR은 그 기업의 성장가능성에 대한 시장의 평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되기 때문에 이를 기준으로 삼았다”고 덧붙였다. 다만 심사 과정에서 연구개발이나 생산기반 확충 때문에 적자가 발생했다는 타당성을 인정받아야만 상장이 가능하다.

테슬라 요건이란 이름은 테슬라 같은 혁신기업에 공모자금을 공급해주자는 뜻으로 금융위가 만들었다. 미국의 전기차 업체 테슬라가 2010년 6월 나스닥에 상장했을 당시 누적적자는 2억6070만 달러(당시 달러당 원화가치 기준 약 3130억원)에 달했다. 설립 뒤 7년 간 한 번도 분기 흑자를 내본 적 없었지만 성공적인 기업공개(IPO)로 공모자금 2억2600만 달러(약 2710억원)를 끌어모았다. 테슬라의 4일 주가는 211.41달러로 공모가(17달러)의 12배에 달한다.

미국 뉴욕 증시의 경우 신규상장기업의 총자산순이익률(ROA)이 평균 -10.6%일 정도로 적자기업 상장이 일반적이다. 이에 비해 코스닥 시장은 재무적 안정성을 엄격히 따지다 보니 상장기업의 평균 ROA(15.2%)가 세계 주요 증시 중 가장 높은 편이다. 성장 가능성이 큰 기업보다는 이미 안정된 기업이 위주로 상장이 이뤄졌단 뜻이다. 앞서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테슬라가 한국기업이었다면 코스닥 상장을 통해 성장기반을 마련하기가 곤란했을 것”이라며 상장제도 개편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성장 가능성 큰 유망기업을 발굴한다는 취지엔 공감하면서도 투자자 피해 발생을 우려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적자가 계속 되는 기업이라면 장기적인 기술력을 보유했다고 해도 투자위험 요소가 있다”면서 “위험을 감수하는 기관투자자라면 몰라도 일반 개인 투자자가 공모형태로 적자기업에 투자하는 건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윤석헌 전 숭실대 금융학부 교수는 “혁신기업에 대한 지원은 정부가 직접 해야 할 일”이라며 “공모시장의 문을 열어주는 건 위험을 투자자에게 전가하는 셈이 된다”고 지적했다.

금융위는 이러한 지적을 의식해 적자기업이 상장하는 경우 일반 청약자에 대해서는 공모가의 90%를 보장하는 환매청구권(풋백옵션)을 주기로 했다. 상장 뒤 3개월 동안 주가가 떨어지면 상장주관사에 공모가의 90% 가격으로 사달라고 청구할 수 있다. 풋백옵션 도입은 공모가가 지나치게 부풀려지는 것을 막는 효과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테슬라 요건으로 상장 문턱을 낮춰도 이를 활용하는 상장주관사가 나오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상장주관사가 적자기업의 성장 잠재력을 판단해서 투자자에 자신있게 보증해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역량을 가진 증권사가 아직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석훈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증권사가 적자기업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한다는 평판을 쌓아야만 투자자들이 믿고 투자할 텐데 그러려면 시간이 걸린다”며 “리더십 있는 증권사 한두 곳이 먼저 나서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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