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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 멀쩡한 장영실 동상 옮기고 '박정희 동상' 세운 이유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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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 KIST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 KIST는 지난 3월 기존에 있던 장영실 동상을 다른 장소로 옮기고 박 전 대통령의 동상을 세웠다. 동상이 들어선지 한 달 뒤 박근혜 대통령은 KIST를 방문해 정보통신의날 기념식 축사를 했다. [사진 고용진 의원실 제공]

국가의 예산으로 운영되는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가 현행법을 어기면서 기존에 있던 장영실 동상을 옮기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을 새로 세웠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더불어민주당 고용진 의원은 “KIST가 기관설립 목적인 과학기술정책 연구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박 전 대통령의 동상을 기증받기 위해 현행 기부금품법을 편법으로 악용했다”고 주장했다.

고 의원이 문제 삼은 박 전 대통령의 동상은 현재 서울 성북구 KIST 본관과 국제협력관 사이에 들어서 있다. 해당 동상의 건립 비용은 3억원으로, 지난 3월 윤종용 전 국가지식재산위원장이 기증했다. 문제는 현행 기부금품법이다. 기부금품법에 따르면 국책 연구기관의 기부금품 모집은 원칙적으로 제한돼 있다. 예외적으로 “해당 기관의 설립과 행정목적의 수행을 위해 ‘직접적으로 필요한 경우’에 한해 정부 기부심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기증품을 접수할 수 있다”고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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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 KIST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 KIST는 지난 3월 기존에 있던 장영실 동상을 다른 장소로 옮기고 박 전 대통령의 동상을 세웠다. 동상이 들어선지 한 달 뒤 박근혜 대통령은 KIST를 방문해 정보통신의날 기념식 축사를 했다. [사진 고용진 의원실 제공]

고 의원은 “KIST는 뇌과학과 에너지ㆍ환경, 소재ㆍ시스템 분야 등의 원천기술 개발과 확산을 위해 설립된 곳인데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이 이러한 설립 목적에 직접적으로 필요한 경우에 해당하는지 의문”이라며 “정부가 어떤 근거로 동상의 기증을 승인했는지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의 동상이 들어선 시기는 지난 3월이다. 당시 KIST에는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 등을 발명한 조선 시대 최고의 과학자인 장영실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KIST는 박 전 대통령의 동상을 세우던 시기에 장영실 동상을 중문 초소 뒤편으로 옮겼다.

박 전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진 시기는 박근혜 대통령이 KIST를 방문하기 직전이다. 박 대통령은 연구소가 세워진 1969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KIST 준공식에 참여한 뒤 현직 대통령이 된 이후인 지난 2014년 7월 KIST를 방문했다. 그리고 지난 4월 21일 ‘제49회 과학의 날 및 제61회 정보통신의 날 기념식’이 열렸던 KIST를 다시 방문해 “50년 전 이 자리에 KIST가 설립되던 당시,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를 갓 넘은 아시아의 최빈국 중 하나였다”며 “하지만 기술 보국의 신념과 열정으로 도전한 지 반세기 만에 대한민국은 세계가 인정하는 과학기술과 정보통신 강국이자,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성장했다”는 축사를 했다. 박 전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진 시기는 박근혜 대통령의 KIST 방문을 한달 앞둔 시기였다.

고 의원실 관계자는 “최근 3년간 KIST는 박 전 대통령의 동상을 제외하면 기부물품 심사를 신청한 사례가 단 한차례도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며 “KIST가 대통령의 방문을 앞두고 멀쩡하게 있던 장영실 동상을 옮기고 박 전 대통령의 세운 이유는 ‘과잉충성’으로밖에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고 의원은 또 "KIST가 정부부처의 기증 심사가 끝나기 전인 지난해 12월 박 전 대통령의 동상 주변의 조명공사를 위해 6500만원의 경상비를 책정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주장했다. 경상비는 연구실안전관리, 연구보안관리, 윤리활동비, 기술창업 출자금 등에 사용되는 예산 항목이다. 현재 조명공사까지 마친 2미터 높이에 황금색으로 만들어진 박 전 대통령의 동상 뒤편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설립 5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가 불모지였던 시기에 과학 기술 입국의 신념으로 과학 기술 발전의 씨앗을 뿌린 설립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숭고한 뜻을 기려 이 동상을 세우다”라고 적혀 있다.
KIST는 박 대통령의 핵심 정책인 ‘창조경제’의 주도 부처인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연구소다.

KIST는 고 의원의 의혹 제기에 대해 "장영실 동상이 원래 있던 장소는 박 전 대통령의 동상이 설치된 장소와 150m 이상 떨어져 있어 박 전 대통령의 동상 설치와는 무관하다"고 해명했다. 동상 주변 조명공사에 경상비를 투입했다는 지적에 대해선 "동상 설치와 별도 사업인 KIST 50주년 기념공원에 조성에 투입된 돈"이라고 밝혔다. KIST가 별도 사업으로 진행했다는 해당 공원은 박 전 대통령의 동상이 서 있는 곳이다. KIST는 또 "동상 설치 시점은 3월 11일로, 박 대통령의 KIST 방문을 최종 통보받은 시점인 3월말과 차이가 난다"며 박 대통령의 KIST 방문에 맞춰 동상을 설치했다는 의혹을 부인했다. KIST와 연관성이 없는 동상을 설치했다는 주장에 대해선 "행정자치부에 기부심사를 요청해 승인 받은 사항으로 편법으로 악용한 바가 없다"고 반박했다.

KIST를 비롯해 미래부 산하인 우정사업본부도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 우표’를 제작할 계획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현행법령 위반 의혹을 받기도 했다. 정의당 추혜선 의원은 우표 발행과 관련해 “기념 우표를 발행할 경우 우표발행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치도록 하고 있는데 이번 결정은 우표발행심의위원회가 심의 과정에서 준수해야 할 법규인 '우표류 발행 업무 처리 세칙'을 정면으로 위반했다”며 “정치적 논쟁의 소지가 있는 소재로 기념 우표 발행을 할 수 없음에도 박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우표 발행을 결정해서 우리 사회를 소모적 논쟁으로 몰아넣었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대통령 사후에 생일을 기념해 우표를 발행했던 사례는 단 한 차례도 없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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