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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은행 경영진의 인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요즘 어느 시중은행의 신임행장이 재무장관실을 찾아가 새 임원진의 명단을 내밀었다. 장관은 고개를 돌리며 그냥 들고 나가라고 오히려 야단을 쳤다.
임시주주총회 전날 그 행장은 역시 은행감독원장의 면담을 요청했으나 정중히 거절당했다. 인사권은 신임행장이 알아서 하라는 얘기였다.
이것은 신문에 난 경제계 가십의 한 토막이다. 어디까지 믿어야 좋을지 모르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재무장관이나 은행감독원장은 왕년엔 모두 은행인사에 직·간접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오던 자리의 사람들이다. 바로 그들이 고개를 돌렸다면 주목할 만한 일이다.
5·16혁명 이후 은행의 대주주가정부로 바뀌고 나서 은행의 큰 자리 인사는 으레 정부 쪽에서 좌지우지해 왔다. 이것은 인사만이 아니라 정부가 은행운영의 전반을 참견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되었다. 은행운영의 핵심은 돈 꿔 주는 일이다. 관치 금융이란 여기서 나온 얘기다.
제5공화국이후 갖가지 대형 금융사고가 노출되면서 은행민영화의 요구가 경제계 안팎에서 제기되었다.
정부도 관치 금융에 골치를 앓다 못해 비로소 민영화의 길을 터놓았다. 다만 은행주식의 소유상한선을 엄격히 그어 놓고 정부지분을 내놓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관 치냐, 민 치냐를 구분하는 마지막 기준은 따로 있다. 인사권을 어느 쪽에서 행사하느냐가 그것이다.
정부가 은행경영진의 인사권을 꼭 쥐고 있는 한, 그 은행을 놓고 민영은행이라고 할 사람은 없다. 요즘 우리 주변의 시중은행들이 그런 식이었다.
실질적으로 은행의 인사권에 관의 입김이 작용하는 동안은 은행의 자율운영을 아무리 외쳐도 소용이 없다. 막후의 인사권 행사자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을 행장이 무슨 재주로 마다할 수 있겠는가.
오늘 우리나라 은행들이 발행주식의 제값이나 겨우 받을 정도로 불신과 부실의 대상이 된 것은 창피한 노릇이다. 요즘은 2류, 3류 회사의 주식도 제값의 두 배도 넘게 거래되고 있다. 은행이 이처럼 빛 좋은 개살구가 된 것은 그 이유가 먼 곳에 있지 않다. 관치 금융의 병폐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은행은 한마디로 돈 장사를 하는 기업이다. 그것은 엄연히 상행위인데 상거래의 기본을 외면하고 운영하면 기업으로서 생존할 수 있겠는가.
상품을 외상으로 내줄 때면 적어도 그 거래선의 신용상태나 담보 력, 장래성 등을 면밀하게 뜯어보고 앞뒤를 재 본 다음에 조심스럽게 결정한다.
아무개가 어느 기업에다 대고 누구에게 외상을 마음놓고 주라고 압력을 넣어도 이쪽에서 그런 확신이 서지 않으면 끝까지 막무가내로 버틸 것이다. 이것이 기업경영 방식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시중은행은 그만한 경영의 기본 룰도 지키지 않았다. 인사권 자, 그것도 극히 정치적이고 관료적인 판단과 이해와 편의에 의해 누구에게 얼마를 꾸어 주라고 하면 인사권자의 지시인데 행장이 마다하기 어렵다.
이런 관행과 폐습과 경직된 관료적 운영이 오늘 우리나라의 시중은행을 그 모양으로 만들었다.
은행의 부실화는 은행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부실기업을 양산해 결국은 통화증발의 요인을 만들어 그 부담은 국민의 어깨로 돌아간다.
종래의 은행 부실대출, 전 책임 운영에서 비롯된 부실기업들은 지금도 유령처럼 나타나 입을 벌리고 은행금고를 넘보고 있지 않은가.
은행인사권의 자율화야말로 책임경영체제를 확립하는 첫 걸음이다.
은행이든, 기업이든, 그 근본을 해치는 가장 무서운 적은 책임을 지지 않는 경영이다.
이번 어느 신인행장의 인사권 자율행사는 관의 일회적인 선심차원이 아닌, 은행경영쇄신의 일대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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