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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건보료 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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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훈 기자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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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훈
사회1부 기자

“소득이 하나도 없는데 왜 이렇게 건강보험료가 많습니까?” “회사 다니다 퇴직했는데 건보료가 배로 뛰었습니다.”

건강보험공단에 쏟아지는 대표적 민원 사례다. 건보료 민원은 2013년 5729만 건에서 지난해 6725만 건으로 2년 새 1000만 건 늘었다. 올해도 4300만 건(7월 기준)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악화일로다. 민원은 주로 지역가입자들이 한다. 소득 중심인 직장가입자와 달리 성·연령·자동차 등 복잡한 부과 기준에 따라 보험료가 매겨지는 탓이다. 건보료를 적게 내고자 가족 중 직장가입자의 피부양자로 갈아타 무임승차하는 얌체 자산가들의 꼼수도 부지기수다.

이런 건강보험 부과 체계 개편이 최근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정부가 표심을 의식해 개편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성상철 건보공단 이사장의 발언(21일)이 불을 붙였다. 파장이 커지자 보건복지부가 23일 긴급 브리핑을 열고 해명에 나섰다. 권덕철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성 이사장과 정부의 입장은 다르지 않다. 개편안이 표를 의식해서 마련되기보단 합리적 근거에 따라 검토돼야 한다는 취지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개편안 추진 방향·시기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해명을 위한 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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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정부의 개편안은 2년 가까이 잠자고 있다. 복지부는 지난해 1월 연말정산 파동이 터지자 마무리 단계였던 개편안 발표를 무기한 연기했다. 여론의 질타를 받자 재추진을 선언하고 당정협의체도 만들었다. 수차례 회의와 워크숍을 통해 틀을 잡아놨지만 발표는 감감무소식이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건보료가 오를 수 있는 일부 고소득 가입자의 ‘표심’을 자극하지 않으려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온다. 전문가들과 건보공단 내에서 “성 이사장이 할 말을 했다”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6월 모든 가입자에게 소득 중심으로 보험료를 매기는 개편안을 따로 내놓았다. 이에 대해 성 이사장은 “급진적이라 실현 가능성 낮다”고 말했다. 야당 안이 오히려 개편 논의를 후퇴시켰다는 반응도 있다. 김진현 서울대 간호학과 교수는 “건보료 개편은 이념이나 표심과 상관없는 민생과 민심의 문제다. 여·야·정이 모두 참여하는 건보료 부과 체계 개선위원회라도 꾸려서 공식 협의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개편 논의가 헛돌고 있는 사이 하루 수십만 건의 건보료 항의는 계속되고 있다.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월 5만원의 건보료를 내야 했던 ‘송파 세 모녀’의 비극도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언제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눈물을 흘려야 정부와 여야는 불합리를 고칠 것인가. “표를 의식하기보단 합리적 근거에 따르겠다”는 복지부의 해명은 말뿐인가.

정 종 훈
사회1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