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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숨을 참아야 사는 여인들의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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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연

숨을 멈춰야 살 수 있는 여인들이 있다. ‘물숨’ (9월 29일 개봉, 고희영 감독)은 한평생을 물질하며 살아가는 제주도 우도 해녀들 이야기를 7년간의 취재로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해녀들에게 바다는 곧 삶이다. 그리고 해녀들은 그곳에서 욕망을 다스리고 자신의 숨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해녀들이 담긴 영화 스틸 이미지를 한참 바라보던 고 감독은 “해녀 삼춘들을 만난 후 내 인생이 달라졌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진으로 보는 ‘물숨’ 그리고 해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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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영 감독 [사진=라희찬(STUDIO 706)]

우도 해녀들의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지기 전, 책으로 먼저 발간됐다. 이 사진은 『물숨』(나남)의 표지이자, 영화의 엔딩 장면. 이 장면에서는 양방언 음악감독이 영화를 위해 작업한 곡 ‘물숨’이 흘러나온다. “사진 속 해녀는 김정자 할머니예요. 딸이 열여덟 살 때 바다에서 물질하다 목숨을 잃었다고 해요. 할머니를 보면 ‘딸을 데려간 바다로 나아가는 마음은 어떨까’ 하고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할머니는 그 바다를 원망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곳에서 위로를 받죠. 어느 경지에 이르러야 이런 마음을 갖는 게 가능할까요. 할머니의 존재 자체가 제게 큰 위로가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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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우도 젊은 해녀 모임)’ 회원인 이순옥 해녀예요. 순옥 언니는 상군이에요. 스물다섯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해녀 일을 시작했는데 대단하죠. 처음엔 언니가 신기했어요. 귀고리를 하고, 화장을 한 후에 바다로 들어가더라고요. 그건 외출복보다 잠수복을 입는 날이 더 많은 언니의 유일한 사치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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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봄에 고창선 할머니가 바다에서 천초(우뭇가사리)를 따다가 돌아가셨어요. 할머니를 발견한 사람은 같은 바다에서 작업하고 있던 둘째 딸 강덕희 언니(사진 오른쪽)였죠. 여든 살이 넘은 할머니가 바다에 나가는 걸 온 가족이 말렸지만,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으셨다고 해요. 언니는 어머니의 마음을 알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 바다로 나가요. 어머니 나이가 되어 자신의 몸이 다하는 날까지 물질하고 싶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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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살에 시달리는 모습이에요. 해녀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게 멀미예요. 조류가 센 날엔 파도가 출렁거리고 오르락내리락하니까, 70년 동안 물질한 해녀도 중간에 물 밖으로 나가서 먹은 걸 토하고 올 정도죠. 그래서 해녀들은 물도 잘 안 마시고, 속이 부대낄까 봐 아침과 점심 식사도 거른 채 일곱 시간 이상 물질을 해요. 정말 독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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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들에겐 바다의 계급이 정해져 있다. 참을 수 있는 숨의 길이에 따라 상·중·하군(각각 수심 15m 이상·8~10m·5~7m에서 작업 가능)으로 나뉘고, 수심이 가장 낮은 곳에서 작업하는 초보자들은 똥군이라 부른다. 해녀들은 태어날 때부터 숨의 길이가 정해진다고 믿는다. “처음부터 상군 바다에서 놀던 해녀는 팔순이 되어도 상군 바다에서 일하고, 하군 해녀는 아무리 젊어도 더 깊은 바다로 나아갈 수 없어요. 만약 자신의 숨을 잊고 더 깊은 바다로 나가려 욕심낸다면 어떻게 될까요? 눈앞의 물건에 욕심이 생겨 자신의 숨을 넘어서게 되는 순간, 바로 ‘물숨’을 먹게 돼요. 물숨을 먹는 건 곧 바다가 무덤이 된다는 뜻이죠. 그래서 해녀들은 늘 바다에서 욕망을 다스리며 살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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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신을 모시는 제주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이 영등신이에요. ‘영등할망’이라 불리는 여신인데, 바람을 일으켜 바다에 씨를 뿌려 준다고 해요. 영등신은 음력 2월 1일에 지상으로 내려와 보름 정도 머무는데, 이때 영등굿을 지내죠. 신에게 잘하면 그해 바다에 풍년이 든다고 믿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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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 준비물 3종 세트’가 있어요. 먼저 쑥인데요, 쑥에 치약을 묻혀 물안경을 닦으면 김이 서리지 않아요. 그리고 물이 스며들지 않게 귀를 막을 땐 ‘씹던 껌’이 최고죠. 수압으로 인한 두통을 이기기 위해서는 ‘뇌선’이라는 약을 빈속에 꼭 챙겨 먹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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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초를 말리는 걸 보면 ‘할머니가 이것을 따기 위해 얼마나 숨을 참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죠. 천초는 젤리나 다이어트 식품의 원료가 되고, 화장품의 부유물이 침전되는 걸 막는 재료로도 쓰여요. 우도의 천초는 전량 일본에 수출될 만큼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거든요. 해녀들에겐 고소득원이에요. 똥군 해녀가 한철에 700만원 정도 수익을 올리니까요. 천초는 수심 4m 안에서 채취하기 때문에, 천초를 딸 때는 상·중·하군 구분 없이 같은 바다에서 경쟁해요. 그래서 이때 가장 많은 사고가 나죠. 조금만 더 숨을 참으면, 그만큼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으니까요. 보통 해녀들이 물때에 따라 한 달에 보름 정도 쉬는데, 천초가 나는 봄부터 초여름까지는 매일 작업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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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 삼춘들이 숨을 참은 대가는 이승의 밥이 되고, 남편의 술이 되고, 아이들의 공책과 연필이 되었다.’ 해녀들을 보며 고 감독이 적은 메모다. “7년 넘게 해녀 삼춘들과 지내다 보니 테왁이나 오리발만 봐도, 숨비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 수 있어요. 자맥질하는 모습을 보고도 알 수 있죠. 입수할 때 동작이 모두 다르거든요.”

제주어 미니 사전

삼춘 제주도에서는 남녀 구분 없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을 친근하게 삼춘이라 부른다.
자맥질 해녀들이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
숨비소리 물질 후 해녀가 물 밖으로 올라와 가쁘게 내쉬는 숨소리.
테왁 물질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도구. 해녀의 위치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이지영 기자 lee.jiyoung2@joongang.co.kr 사진=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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