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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에 사라진 난민 8만 명 구호품…미·러는 삿대질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폭격 먼지를 온 몸에 뒤집어쓴 채 넋이 나간 표정으로 구급차 의자에 앉아 있던 5세 꼬마 옴란 다크니시가 만들어낸 시리아 휴전이 한 달여 만에 빛을 잃었다. 시리아 내전의 참상을 일깨운 다크니시의 모습에 전 세계가 분노했고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은 임시 휴전에 합의했다.

유엔 호송차량 무차별 폭격 놓고
미국·러시아 서로 “상대편 소행”
의약품·식량 실은 31대 중 18대 전소

하지만 지난 19일(현지시간) 휴전이 종결되자마자 시리아 알레포로 구호물품을 싣고 가던 유엔 등 국제기구 호송차량이 무차별 폭격을 받았다.

시리아·아랍적신월사(SARC) 소속 현지인 직원 1명과 민간인 최소 20명이 목숨을 잃었다. 숨진 민간인 중엔 한 살짜리 여자 아기도 있었다. 구호 차량 31대 중 18대가 불에 완전히 전소돼 앙상한 뼈대만 남았다. 알레포 서쪽 외곽 마을에 고립된 주민 7만8000명에게 전달돼야 할 의약품·밀가루·옷 등도 사라졌다.

전쟁 중이어도 주민을 위한 인도적 목적의 국제기구 구호물품 차량을 공격하지 않는 게 전쟁 당사국 사이의 불문율이었다. 뉴욕타임스(NYT)는 “구호물품 차량이 대규모 공습을 받기는 2011년 시리아 내전이 시작된 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20일 보도했다.

국제사회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을 각각 지원하는 러시아와 미국은 상대 측이 폭격한 것이라며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미 정부 관계자는 “시리아 전역의 상공을 레이더로 추적한 결과, 당시 러시아 전투기 수호이(Su)-24가 구호물품 차량을 폭격하는 걸 포착했다”고 말했다.

미 중부사령부 소속 존 토머스 대령은 “사고가 있던 19일 미군은 시리아에서 자체 또는 연합 공습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시리아 내전을 모니터링 하는 시민단체 시리아인권관측소(SOHR)는 휴전이 끝난 이날 하루 동안 시리아 정부군과 러시아 전투기가 구호물품 차량을 포함해 알레포 인근에서 35차례 공습을 가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시리아 정부군과 러시아 측은 구호 차량을 공습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시리아 국영TV는 “알레포에서 구호 차량 행렬을 공습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이고리 코나셴코프 러시아군 대변인은 “우리측 무인기가 공습 현장을 촬영한 비디오 판독 결과 시리아 반군이 구호 차량을 뒤따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비디오에서 대형 박격포를 실은 테러리스트의 픽업 트럭이 구호 차량을 따라 움직이는 장면이 분명히 보인다”고 설명했다.

미국과 러시아가 신경전을 벌이면서 시리아 내전 휴전협상도 물 건너 가는 분위기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지난 9일 시리아에서 일주일 간 임시 휴전(12~19일)에 합의했고 점차 휴전기간을 늘려가는 방법을 모색해왔다. 하지만 지난 17일 미국 주도 연합군의 오폭으로 시리아 정부군 다수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8일엔 정부군이 알레포에서 공습을 감행했다. 교전이 이어지며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은 휴전이 실패로 끝났다고 선언했다.

케리 장관과 라브로프 장관은 이번 주 중 유엔 총회에서 별도로 만나 시리아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 하지만 폭격 책임 문제로 난관이 예상된다고 NYT는 전했다.

임시 휴전이 성과 없이 끝나 시리아 주민들만 피해를 입게 됐다. 제2, 제3의 다크니시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이다.

더욱이 유엔은 이날 안전이 담보될 때까지 시리아에 대한 구호물품 전달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백민정 기자 baek.mi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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