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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포트리스(The Fortress) #6. 드라이브 (3)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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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진은 원격으로 차고 문을 열면서도 사라진 소녀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죽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 봤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30년 동안이나 해왔던 짓을 실수할 리가 없었다. 칼을 통해 손으로 전해진 느낌으로도 척수가 모두 끊어진 것이 분명했다.

죽였다는 확신이 들자 원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시체가 혼자 걸어가지 않은 이상 누군가 데려갔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어쩌면 원진의 살인 장면을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불안감이 엄습했다. 모든 일은 아주 작은 곳에서 금이 가기 시작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차고에 들어선 원진은 차고 문을 내리며 닫힐 때까지 지켜보았다. 없어진 소녀의 대한 생각에 몰두하느라 부작용자들이 달려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차고 문이 거의 닫혀 갈 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아래 틈새로 쇠파이프 하나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쇠파이프에 걸린 차고문은 굉음을 내며 내리 눌렀지만 쇠파이프는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원진은 문 닫는 걸 멈췄다. 강판으로 만든 문이 고작 쇠파이프에 망가질 리 없었지만, 문을 여닫는 기어에 무리가 와서 고장이라도 나면 손이 더 많이 가기 때문이었다. 원진은 그쪽에 시선을 둔 채 자동차 문을 열고 시트 아래를 더듬어 칼을 찾아들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문틈 아래로 바깥쪽의 동태를 살폈다. 차고 문에 붙어있는 건 두 명. 원진은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어차피 대답이나 반응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신약 부작용이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쯤, 뉴스는 부작용인 분노에 대한 정보를 쉴 새 없이 내보냈다. 극단적인 분노에 휩싸이면 이성은 사라지고 폭력 본능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대화로 해결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였다. 그럼에도 많은 평화주의자들이 신약 부작용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대화를 시도했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
언젠가 봤던 영화 대사가 떠올랐다.

“희로애락(喜怒哀樂) 중에 뭐가 제일 형님 같으냐? 분노가 제일 형님이야. 화가 나면 기뻐지지도 않고 슬퍼지지도 않고 즐거워지지도 않아요. 그런데 그 반대는 돼. 분노가 대빵이라 이거야.”

부작용자들은 그 영화의 대사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분노 때문에 인간다움은 모두 희미해지고 오직 공격하려는 본능만 남은 것이다.
원진은 벽면에 몸을 붙이고 차고 문을 다시 올렸다.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씩씩거리는 놈들의 숨소리가 점점 커졌다. 분노만 남은 사람들에게 참을성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 반도 채 열리지 않은 문틈으로 기어들어왔다.
원진은 먼저 기어들어오는 놈의 턱을 걷어차고는 칼로 마무리를 하려는 듯 머리끄덩이를 잡고 칼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생각을 바꿔 칼을 든 손을 내렸다.

“아저씨, 차고까지 청소하게 만들지는 맙시다.”

버둥거리는 놈을 향해 중얼거린 원진은 놈의 턱을 한 번 더 걷어차 기절시켰다. 일반인이었다면 이미 기절했을 텐데, 놈들은 한 번에 정신을 잃는 법이 없었다. 최소한 두세 번은 두들겨야만 했다.
또 다른 놈이 기어들어오자 똑같이 발로 여러 번 걷어차 기절시키고는 차고 문이 완전히 열리기를 기다렸다. 차고 문이 완전히 열리자 원진은 기절한 두 놈을 길거리로 끌고 나갔다. 이미 통금시간이 지났기에 수시로 주변을 둘러보며 길가에 놈들을 나란히 눕히고는 칼로 그들의 왼쪽 겨드랑이를 한 번씩 깊게 찔렀다. 그리고 팔을 옆구리에 딱 붙여 두었다.
정신이 돌아오면 놈들은 일어나 어딘가로 향할 것이고 얼마간 돌아다니다 과다출혈로 죽을 것이다. 그러면 원진의 집 주위에서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때 계엄군의 육중한 트럭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원진은 재빨리 차고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누군가 강한 힘으로 원진의 발목을 붙잡았다. 깜짝 놀란 원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두 번째로 기절시켰던 놈이 원진을 잡은 채 노려보고 있었다. 놈이 손을 강하게 움켜쥐자 발목에 통증이 느껴졌다. 어쩌면 부러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 정도였다. 원진은 그의 손을 뿌리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놈은 으르렁거리는 표정으로 일어나 원진의 발목을 확 들어 올렸다.
균형을 잃은 원진은 뒤로 쓰러졌고 놈은 짓밟으려는 듯 높이 뛰어올라 원진의 몸 위로 덮쳐 내려왔다. 몸을 굴려 간신히 피한 원진은 벌떡 일어나 놈과 대치했다.

놈보다 계엄군의 트럭 소리가 더욱 신경 쓰였다. 통금이 지난 이후의 계엄군은 합법적인 살인자나 마찬가지였다. 통금시간에 다니다 발각되면 현장에서 사살해도 좋다는 지침이 있었고 일부 병사들은 그런 사실을 즐기고 있었다.
놈을 노려보던 원진은 놈의 뒤쪽으로 시선을 돌리다 당황했다. 차고 문이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자신이 문을 닫지 않은 사실을 떠올렸다.

계엄군의 약탈은 일상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 계엄군은 시민군의 게릴라전에 시달리며 군수품의 손실이 급속도로 커졌고 그 부족분은 시민에게 징발(徵發)해서 충당했다. 이에 반발한 시민들이 문을 걸어 잠가 버리자 징발을 남용할 수 없게 된 계엄군은, 뭐든 눈에 띄기만 우선 빼앗은 다음 쓸모를 따지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원진의 차고 정도면 계엄군에겐 보물창고나 다름없었다.

견물생심(見物生心). 차고를 털고 나면 그걸 빌미로 정원으로 밀고 들어갈 것이고, 그다음은 집이 될 것이다. 그러면 원진은 제대로 저항한 번 하지 못하고 그의 모든 것을 통째로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원진에겐 놈을 처치하는 것보다 차고 문을 닫는 게 더욱 시급했다. 문제는 놈이 차고 문 앞에 버티고 서 있다는 것이었다. 골목길 코너 쪽에서 트럭이 뿜어내는 커다란 헤드라이트 불빛이 희뜩 거리며 다가왔다. 이대로 있다간 계엄군에게 들키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원진은 현역 시절의 감각으로 칼을 꺼내들었다. 놈이 제대로 서 있는 건 처음 봤기에 생각보다 큰 키와 덩치에 내심 당황했다. 왼쪽 겨드랑이에서 흘러나오는 피의 양으로 보아 기다리면 놈은 알아서 죽을 테지만, 다가오는 계엄군의 트럭 때문에 기다리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원진은 놈을 부둥켜안고 차고 안으로 들어간 다음, 차고 문부터 닫고 그 안에서 놈을 처리할 생각으로 놈을 향해 몸을 날렸다. 놈의 몸통에 자신의 어깨가 닿는 순간 원진은 절망감을 느꼈다.

놈의 단단한 몸은 박아놓은 말뚝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놈에게 잡힌 원진은 몸이 허공으로 들리는 것을 느꼈다.
놈은 원진을 들어 올려 등 뒤로 던져버렸다.

바닥에 처박힌 원진은 충격 때문에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놈 덕분에 차고가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벌떡 일어나 차고 안쪽 벽에 있는 수동 스위치를 눌렀다. 기어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차고 문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원진은 차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놈이 그냥 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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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원진의 뒷덜미를 붙잡아 반대편으로 내동댕이쳤다.
아스팔트 바닥에 어깨가 찍히면서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온 신경은 차고 문에 쏠려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가로막고 있는 놈을 피해 차고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원진이 왼쪽으로 피해 가려고 하면 놈도 왼쪽을 막아섰고, 반대로 향하면 놈도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부작용자들 대부분은 쉽게 물리칠 수 있었지만 간혹 아드레날린이 다른 놈들보다 더 과다 분비되는 놈들을 만나면 살인 전문가인 원진조차 애를 먹었다. 훈련을 통해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는 원진조차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속도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계엄군 트럭의 엔진 소리가 지척에서 들렸고 헤드라이트 불빛은 옆 골목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코너만 돌면 바로 원진과 맞닥뜨리는 상황이었다.
원진은 칼을 들고 놈의 몸을 보이는 대로 찌르고 베었다. 하지만 놈을 제치고 차고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차고 문은 거의 닫혀서 몸을 옆으로 굴려야만 들어갈 수 있는 틈만 남겨두고 있었고 그 틈은 점점 더 좁아지기만 했다.
초조해진 원진은 키가 큰 놈의 가랑이 사이를 노리고 상체를 숙이고 덤벼들었지만 놈이 휘두른 발길질에 깜짝 놀라 뒤로 풀쩍 뛰어 물러나다가 발이 꼬이며 벽에 부딪혀 주저앉았다.

차고 문은 완전히 닫혀 버렸고 놈은 매서운 기세로 원진에게 달려들었다. 그때 골목길 코너로 밝은 헤드라이트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돌격용으로 개조한 계엄군의 트럭이었다.
갑작스러운 불빛에 놀란 놈은 멈칫하더니 이내 인상을 구기며 트럭을 향해 달려들었다.
트럭 위로 총을 든 병사의 상체가 불쑥 올라오더니 놈을 향해 총을 쏘았다. 총에 머리와 가슴을 뚫린 놈은 그 자리에 쓰러지고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병사는 플래시를 들고 놈의 시체를 확인하고는 이어서 원진을 향해 빛을 비추었다. 눈을 감고 죽은 척하고 있는 원진을 훑고 지나간 불빛은, 원진에게 맞아서 기절한 채 계속 피를 쏟아내고 있는 또 다른 부작용자를 비추었다.
병사가 고개를 숙여 트럭 안쪽을 향해 물었다.

“확인 사살할까요?”

차 안에서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몇 개인데?”

“두 개요.”

“방금 죽인 거 빼고?”

“네.”

트럭 창문이 내려가고 중대장이 얼굴을 드러냈다. 그는 원진과 부작용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원진은 혼신의 힘을 다해 숨까지 멈춰 죽은 척했다.
숨이 차오르기 시작할 때 즈음 중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자. 총알 낭비하지 말고.”

잠시 멈춰 섰던 트럭은 다시 육중한 엔진 소리와 함께 지나쳐 갔고, 불빛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원진은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원진은 눈을 뜨자마자 곁에 쓰러져 있는 부작용자의 목에 칼을 깊게 찔렀다가 빼냈다. 똑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진은 급속도로 피곤함을 느끼며 그대로 잠시 쉬었다. 차고 더럽히지 않으려다 죽을 뻔했던 방금 전의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이제 몸을 쓸 나이는 지났다고 새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는데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울 뿐이었다.

처음 발병자가 나타난 것은 인천국제공항이었다.
두통을 호소하던 40대 남자는 공항에 설치된 열 감지기에 높은 열이 감지되었고 공항 직원들은 그의 입국을 막았다. 한 달간의 출장을 마치고 귀국하는 중이었기에 화가 단단히 난 그는 저항을 하다가 두통을 호소하며 쓰러져 피를 토했다. 공항 의료센터로 옮겨진 그는 피부 발진과 더불어 피눈물을 흘리며 두 시간 동안 몸부림을 치다 사망했고 의료센터는 ‘에볼라 출혈열’ 아종(亞種)으로 진단했다.

메르스 사태를 겪은 기억 때문인지 공항 당국과 정부의 대응은 빨랐다. 공항은 사망자의 동선을 따라 구역을 폐쇄하고 출입국자 전원을 대상으로 검사를 실시했다. 질병관리본부는 사망자의 혈액과 조직 샘플을 통해 에볼라 바이러스의 변종에 의한 질병이라는 것을 알아내 발표했다.

당국의 빠른 대응에도 감염자들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부와 제약사의 팀워크는 더없이 훌륭했다. 긴밀한 협력을 통해 제약사들은 2주 만에 치료제를 개발해 냈고 이례적으로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약을 생산했다. 정부는 유통으로 이익을 챙기려는 모든 이들을 주저 없이 중형을 내리며 유통에 방해되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신약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편의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감기약만큼이나 공급량이 충분했기에 약을 사기 위해 줄을 서거나 다투는 풍경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그렇게 발병 한 달 만에 단 여섯 명의 희생자만 남기고 막아냈다.

대한민국은 한동안 축제 분위기였다. 떨어지던 현 정부의 지지율은 급속도로 올랐고, 치료제 개발에 참여한 제약사들의 주가는 며칠 동안 상한가로 마감했다. 승리에 도취한 정부는 빠르게 대응해준 제약사들에게 보상을 해주겠다며 언론과 함께 나섰다. 개발된 신약은 치료는 물론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 발표에 대해 소수의 전문가들이 정부에 경고를 했지만, 전염병을 상대로 대첩을 거둔 정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국민은 질병을 완전히 제압한 정부의 말을 신뢰했고, 병에 걸리지 않은 국민들까지 사소한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구충제를 사 먹듯 신약을 먹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 모든 것을 모두가 즐길 자격이 있었다.
신약의 부작용이 가시화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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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중앙대학교 졸업. IT 회사 입사, 경영기획, 전략기획, 사업제휴 등의 다양한 직무 경험.
1999년 포털사이트에 <왼팔> 연재. 2001년 출간. 이후 소시오패스를 전면에 내세운 액션 스릴러 <Business is business>(2010), <유령 리스트>(2015)로 액션물 출간.

2001.08 「왼팔」
2003.03 「왼팔II」
2005.07 「적경」
2008.06 「피해의 방정식」 (한국 스릴러문학단편선)
2010.01 「위험한 오해」 (한국 스릴러문학단편선II)
2010.10 「Business is business」
2013.11 「사이비」 (원작 : 연상호)
2014.03 「조난자들」 (원작 : 노영석)
2015.08 「유령 리스트」
2015.10 「살인의 기원」 2015 부산영화제 북투 필름 피칭작 선정
2016.04 「왼팔 rebuild」
2016.04 「블랙러시안」, 「증오」, 「복수의 미학」 (맨 헌터 태성 시리즈)
2016.05 「십이 죄」
2016.07 「세일즈 플래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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