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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환상 편의점 #5. 미래 안약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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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눈에 띄게 짧아지기 시작했지만 아직 지난여름, 폭염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남자의 옷차림은 몹시 남루했다. 그는 제법 두꺼운 점퍼를 입은 채 남아있는 열기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탓인지 몸에서는 퀴퀴한 악취가 났다. 행인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에게서 최대한 떨어져서 지나가려 애썼다.

남자는 한 손에 거의 바닥을 보이는 소주병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는 텅 빈 눈으로 비틀거리며 걷다가, 가끔 생각났다는 듯 소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마치 그것을 연료로 하여 간신히 움직이는 것 같았는데, 그 소주도 얼마 안가 바닥나고 말았다.

“니미럴…….”

남자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도 소주병은 얌전히 재활용 수거통에 버렸다.

‘제기랄… 한 번, 그 딱 한 번이 끝까지 맞아주질 않네.’

처음 강원랜드에 갔을 때는 열 번에 서너 번은 땄다. 그러면서 50만 원 정도를 벌었다. 그때의 짜릿한 기억을 잊지 못해, 남자는 종종 그곳을 찾았다. 최대 베팅 금액이 30만 원으로 제한된, 나름 나라에서 관리하는 곳이었기에 큰 문제는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열 번에 서너 번은 한두 번이 되더니, 결국 스무 번에 한두 번 꼴로 간신히 따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돈을 쏟아 부었다. 하루에 30만 원이라는 제한이 오히려 남자를 그곳에 묶어두었다. 그만큼 밑천을 복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뒤늦게 알아챈 아내와 딸이 울면서 붙잡았지만 소용없었다. 대학생 딸의 등록금으로 쓰려고 모아둔 적금 통장을 아내 몰래 들고 나왔을 때는 이미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다 그 돈마저 다 떨어지자 남자는 ‘앵벌이’가 되었다.

앵벌이란, 베팅할 금액은 없지만 카지노 주변에서 자리 맡아주기, 잔심부름 등을 하며 소정의 수고료를 받는 사람을 일컫는 은어였다. 남자의 이름이 불리는 일이 거의 없어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남자는 그저 “아저씨!”나 “어이!” 또는 “거기!”등으로 불렸다. 그런 앵벌이들만 수십 명이었다. 강원랜드는 마치 나라에서 공인한, 연옥(煉獄)의 가장자리 같았다. 영혼을 저당 잡힌 이들이 공허한 눈으로 무수히 떠다니는.

우습게도 앵벌이 전문가가 된 이들 중에는 월수입 천만 원 이상의 고소득자도 있었다. 앵벌이들은 그 돈을 베팅해서 또 잃고 다시 앵벌이로 돌아오곤 했다. 남자는 그 앵벌이 노릇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느 날 문득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정신을 차렸을 때는 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 아내와 딸은 물론, 동생을 비롯한 일가친척들과도 모두 연락이 끊긴 후였다. 남자는 한 마디로 내놓은 사람이 되었다. 집안에서 내놓은 사람, 사회에서 내놓은 사람. 남자는 그제야 겨우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따려고 찾아온 곳에서 모든 걸 잃은 후에야. 그 무렵 그가 가진 거라고는 시계 대신으로 쓰는 스마트폰 하나가 전부였다.

기억을 더듬어가면서 예전에 살던 동네를 찾아와 무작정 걸었다. 그러다 간신히 집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의 집이었던 곳에는 이미 낯선 사람이 살고 있었다. 중년 여인은 무심코 현관문을 열었다가, 남자의 행색을 보고 기겁하여 문을 다시 닫아걸려고 했다. 남자는 털썩 무릎을 꿇고 애걸했다.

“사모님, 전에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만 알려주시면 얌전히 가겠습니다. 여기, 제 가족들이 살던 집입니다.”

남자는 기본적으로 악인은 아니었다. 도박에 중독되어 패가망신했으나 얼굴과 눈빛에는 선함이 남아 있었다. 그 눈빛을 본 것인지, 아니면 남자의 절실함을 느꼈는지는 몰라도, 중년 여인은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저도 몰라요. 제가 전 주인 이사 가는 주소까지 알아둘 일이 없잖아요. 요 앞에 부동산 가서 한번 물어보세요. 저, 이거 받으시고요.”

여인은 꼬깃꼬깃한 오천 원짜리를 조심스레 내밀었다.

“빵이라도 좀 사드세요. 지금 현금이 이것뿐이네요.”

남자는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그의 손은 저절로 돈을 받아 쥐고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고개를 굽실거렸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사모님.”

“가족분들 꼭 찾길 바랄게요.”

부동산에서는 남자의 가족들을 기억하긴 했으나 새 주소와 연락처까지는 알지 못했다. 남자는 바닥이 아득하게 꺼지는 기분이었다. 잠깐 대화하는 사이, 싫은 기색이 역력한 부동산 주인에게 애걸해서 스마트폰을 충전해 켰다. 그는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계속 동네를 헤맸다. 어쩌면 자신이 돌아올까 봐 근처로 이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남자는 골똘히 생각했다. 걸으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 생각은 곧, 염원이 되었다. 가족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좀 다른 종류의 염원이었다.

‘이유는 간단해. 따지 못해서, 이기지 못해서 그런 거야. 딜러가 쥔 카드 패를 내가 알 수만 있었다면, 룰렛이 멈출 숫자를 미리 알 수만 있었다면, 운이 조금만 더 좋았다면, 돈을 잔뜩 벌어 와서 마누라도, 딸내미도 잃지 않고 잘 살았을 텐데……. 아니, 하다못해 한 번의 기회만 더 주어졌더라도!’

아내가 끓여주던 김치찌개의 맛이 떠올랐다. 남자는 문득 지독한 허기를 느꼈다. 오늘 종일 먹은 것이라곤, 길에서 주운 먹다 버린 빵과 소주 한 병이 전부였다. 마음씨 좋은 여인이 줬던 오천 원짜리는 아직 그의 손에 꼭 쥐여 있었다. 이 돈으로 뭔가 먹을 걸 사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마침 어둑해지기 시작한 골목 안쪽에서 불빛이 새어나왔다. 남자는 그쪽으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빛의 정체는 편의점 간판의 조명이었다. 편의점은 어디에나 있었다. 남자가 원래 살던 동네에도 있었고 5년을 허송세월한 그곳에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이름과 조명의 편의점은 난생 처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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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편의점……?”

잠깐 머뭇거리던 남자는 편의점 문을 밀고 들어갔다. 편의점이라면 오천 원으로도 먹을 만한 게 제법 많았다. 사발면 한 개와 삼각 김밥 두 개, 생수 한 병을 사고도 잘하면 소주 한 병을 더 사는 게 가능했다. 운이 좋다면 스마트폰을 충전하면서 잠시 앉아서 쉴 수도 있었다.

“어서 오세요!”

안에 들어선 남자는 흠칫 놀랐다. 새가 지저귀는 것 같은 목소리로 카운터에서 인사하는 여자 점원이 지나치게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점원은 몸에 딱 붙는 검은색 블라우스와, 마찬가지로 검은색 치마를 입고 눈웃음을 쳤다. 짧은 치마 아래로 그가 이제까지 본 것 중 가장 완벽한 다리가 늘씬하게 뻗어 있었다. 예쁜 여자는 편의점에서 일해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말 그대로 쓸데없이 예뻤다.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서나 봐야 어울릴 것 같은 여자였다.

강원랜드에서 앵벌이 노릇을 할 때, 유흥 삼아 놀러 오는 부잣집 사모님이나, 돈 많은 사내들이 끼고 오는 젊고 예쁜 아가씨들을 무수히 봤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 여자보다 예쁜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거기 드나든 여인 모두를 합친 것보다 이 여자가 아름다울 것 같았다. 남자는 점원의 아름다움에 취해, 그녀에게서 은은하게 유황냄새가 난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했다.

“손님, 뭔가 찾으시는 게 있나요?”

한동안 멍해있던 남자는 점원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그, 뭐, 뭐 먹을 만한 게 있을까요? 김밥이나 라면…….”

“어떡하죠, 죄송합니다. 저희 편의점에는 그런 상품들을 취급하지 않습니다.”

“응? 하지만 편의점인데…….”

“대신, 저 뒤쪽 진열대로 가보시면 손님께 꼭 필요한 물건이 있을 거예요.”
남자는 여자 점원이 쉬운 말을 괜히 꼬아서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의 말대로 뒤편 진열대에 와보니, 정말 도시락이며 삼각김밥 같은, 일반적인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먹거리가 하나도 없었다. 그 자리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용도조차 짐작하기 어려운 괴상망측한 물건들만 가득했다. 모형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는 짐승의 머리뼈, 붉은색이 감도는 나무로 만들어진 지팡이, 정체불명의 액체가 찰랑이는 온갖 모양의 병 등.

‘이게 다 뭐야? 혹시 골동품 점에 잘못 들어온 건가? 간판에 분명 편의점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남자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물건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기물들이 저마다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날 봐. 집어, 날 집어. 그는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미쳤나. 그가 막 돌아서서 가게를 나가려할 때였다. 유독 강하게 남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물건이 있었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재질로 만들어진 작은 병이었다. 전체적으로 은빛이었고 주둥이 부분은 스포이트처럼 뾰족했다. 병 가운데에는 검은색으로 사람의 눈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 눈이 분명 깜빡이는 걸 본 것 같았다. 남자는 홀린 듯이 병을 집어 들었다.

“아하, 그게 손님을 부르던가요?”

직후, 갑자기 귓가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그는 깜짝 놀랐다. 어느새 여자 점원이 등 바로 뒤에 와서 서 있었다.

“이게 뭡니까?”

남자의 물음에, 점원은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눈을 밝게 해주는 안약입니다.”

“눈을 밝게 해준다고요? 시력은 지금도 좋은데.”

“아, 제가 말을 잘못했군요. 정확히는 앞날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약이랍니다.”

“앞날을 본다고요?”

남자는 점원이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점원은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예의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믿기 어려우시겠죠. 인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 밖의 일에는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니까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정 의심스럽다면 여기서 시험해보셔도 됩니다.”

“음…….”

남자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여긴 약국도 아니고 편의점이었다. 그것도 몹시 이상한 물건들이 가득한, 기묘한 편의점. 인간이니 상식이니 하는 단어 선택도 수상쩍었다. 만약 눈에 뭘 넣었다가 실명하기라도 하면 누가 책임지나? 그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점원이 말했다.

“손님은 승부사네요. 하지만 계속 지셨죠? 원래 이렇게 살 분이 아닌데……. 앞날을 조금만 엿볼 수 있었다면, 충분히 승자가 될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어……. 아니, 그걸 어떻게…….”

“그 물건이 손님을 부른 데는 이유가 있는 거랍니다. 자신을 제일 잘 써줄 것 같은 사람을 부른 거죠. 더도 말고 딱 한 방울만 눈에 넣어보면 바로 알게 될 텐데, 뭘 그렇게 망설이세요? 이미 더 떨어질 바닥도 없잖아요.”
그녀의 말이 남자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그래, 어차피 더 나빠질 것도 없었다. 눈이 잘못된다면 까짓 소송이라도 걸어서 한몫 챙기면 된다. 남자는 병의 끝부분 마개를 열었다. 주둥이 끝에 바늘구멍처럼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한쪽 눈에만 넣으면 되는 거요?”

“아, 좋은 질문이네요. 양쪽 눈에 다 넣은 후부터 효과가 발휘됩니다.”
그는 용기를 내서, 양쪽 눈에 각각 한 방울씩 약물을 넣었다. 눈이 시원해지는 것 같은 느낌에 일단 안심했다. 최소한 독극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다,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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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소개  
    명지대학교 문예 창작학과 졸업
    단행본 <문답 무용>, <파이널 에볼루션> 출간
    <도전!웹 소설 쓰기>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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