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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 서울서 3일 허송했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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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전진을 멈춘 서울의 사흘-. 이것은 6·25전란 최대의 수수께끼다. 북한공산군에겐 결정적 승리의 시간을 잃게한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고 한국군으로선 지리멸렬 상태의 군대를 가까스로 수습할 수 있었던 사흘이다.
6·25의 새벽에서 6·28새벽의 서울 진입까지 북한공산군은 물밀듯 밀고 왔다. 미아리를 넘던 인민군 2개사단과 1개탱크 여단은 마치 군사 퍼레이드를 하듯 서울에 입성했다. 그랬기에 부대는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았다.
서울 최후의 방어선이 된 미아리의 3천여 국군혼성부대는 퇴로를 차단 당한채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데도 그들은 전진을 멈추었다.
인민군에 있어 그 사흘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한국군과 유엔군에겐 더할수 없이 다행스런 천운의 사흘이었다.
유엔의 참전 결의에 고무된 한국군은 지원군 상륙의 시간을 벌기 위한 작전을 준비했다. 그 사흘이 없었던들 낙동강 교두보는 구축될 수 없었을지 모른다는 아찔한 상상들이다. 그 운명의 사흘엔 어떤 곡절이 있었을까.
흔히 인민봉기 기대설을 든다. 인민군이 서울을 장악하면 빨치산과 남로당 지하당이 선도하는 인민봉기로 남한정부는 무너질 것을 기대했다는 게 그것이다. 김일성은 박헌영등 남로당일파에 패전의 책임을 물어 숙청할 때 이를 구실로 했다. 미제의 앞잡이 박헌영이 있지도 않은 남로당 지하당을 과장해 결정적 시기를 허송케 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패전의 책임을 떠넘기고 정적도 숙청하는 두개의 이득을 노린 조작일 뿐이다. 그해 5월17일 군수뇌부의 마지막 전략회의였던 모란봉회의에서 인민군은 부산까지 진격한다는 김일성의 대남전략을 채택했다. 서울점령후 인민봉기를 기대해 볼만하다고 했던 박헌영도 무력진군이면 2주안에 전쟁을 끝낼 수도 있다고 동의했음이 그들 기록에 남아 있다.
그들은 이 회의를 토대로 6·25에서 8·13까지의 「4단계 50일 작전」을 짰다.
도하장비 부족설을 들기도 한다. 그들은 남침에 앞서 소련에 임진강·한강·금강·낙동강등 4개 하천도하에 쓸 4벌의 장비를 요청했으나 1벌밖에 받지 못해 한강도하를 며칠 늦추었다는 것이다. 자그마한 이유는 될지 모르지만 전진을 멈추게 한 결정적인 요인은 못된다.
경인상행선과 경부복선 두 철교는 남쪽에서 3번째 경간의 침목과 철길 일부만 손상돼 폭파당일 아침에도 국군일부가 차량과 함께 철수할 정도였다. 교판만 약간 손질하면 탱크는 물론 열차도 마음놓고 다닐 수 있었다.
한남동 도선장도 차량까지 건널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어 보병도하 역시 한강이 큰 장애요인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서울이 함락된 28일과 29일 분산 철수한 뒤 부대 재편성조차 제대로 안된 국군의 한강선 방어는 그들의 입장에서 볼때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울의 3일간 인민군은 소규모 포격전 만을 할뿐 강을 건너지 않았다. 전차는 철도정비창에 멈춰 있었고 보병2개사단 역시 용산의 연병장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미공군 정찰기에 포착됐다.
한강변의 전쟁은 30일밤부터 시작됐다. 인민군 주공부대는 마포나루에서 여의도로 진군, 김포쪽 한강둑의 국군방어진과 사격전을 벌였다. 인민군 4사단은 재편성된 국군의 방어에 밀려 두 차례의 실패끝에 1일 새벽 4시에야 남쪽 둑에 오를 수 있었다. 위용을 뽐내던 전차는 보병부대가 한강남쪽 둑을 완전히 장악한 7월3일에야 철길을 따라 도강했다.
그동안 전진을 멈춘 가장 큰 이유는 서울 조기점령에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의 「4단계 50일작전」을 보면 ▲1차작전=7월3일까지 서울점령과 횡성∼이천∼수원선 진출 ▲2차작전=15일까지 대전∼안동선 진출 ▲3차작전=29일까지 포정∼대구∼마산선 진출 ▲4차작전=8월13일까지 부산점령으로 돼 있다. 이「50일」은 38선∼부산간의 4백80㎞를 하루 10㎞씩 진공한다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서울은 이보다 5일이나 빠른 28일 함락됐다.
그래서 그들은 느긋해진 가운데 그날 밤에는 서울점령 축하연을 베풀고 이 작전일정에 맞춰 2차 작전에 대비해왔다.
1, 2군단을 총괄지휘할 전선사령부를 새로 만들고 춘천전선에서 국군6사단의 반격으로 2개연대규모의 병력을 잃은 2사단을 재편성했다.
7월3일 탱크가 한강을 건넌 것은 곧 「4단계 50일작전」계획일정에 맞춘 2차작전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이 작전계획을 수정하려 해도 2가지 난점이 있었다. 일일이 작전지시를 받아온 소련군사고문관의 사전승인을 받아야 하고, 진공속도를 갑자기 앞당길 경우 보급품 추진에도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어쨌든 괴란상태에 빠진 국군에 여유를 준 것은 그들의 최대 과오였다.
승전에 느긋해 있던 사흘, 한강남쪽은 민·군일체가 되어 전열을 정비했다. 국군부대는 학도병을 선두로 한 지원자들로 재빨리 충원되었다.
유엔의 신속한 참전결의는 남쪽의 사기를 더 높였다.
미공군기가 그들이 장악했던 제공권을 위협했고 보병부대도 훨씬 빨리 부산에 상륙해 전선에 투입됐다. 이 모든 것들은 북한 수뇌진이 계산하지 못했던 사태들이었다.

<전국제문제조사언구소 수석연구원 이기봉씨의 6·25 패인분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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