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관리 들어간 기업에 “돈 내놔라” …이상한 구조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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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해운발 물류대란의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모기업인 한진그룹이 결국 나섰다. 한진해운의 법정관리 신청 여파로 바다 위에 떠 있는 화물이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지 6일 만이다. 그러나 완전히 불길을 잡을지는 미지수다.

선주협회 “정부 추가 자금 수혈을”
채권단은 담보 없으면 불가 입장

그동안 세계 각국 항만에서 한진해운 소속 선박의 입출항이 거부되거나 선박이 압류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항만회사 등이 한진해운의 항만사용료와 하역비, 용선료 등을 떼일 것을 우려해서다. 한진해운 보유 선박 141척 중 85척이 운항 차질을 빚고 있다. 한진해운이 체납한 금액은 용선료 2400억원을 포함해 6100억원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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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호 부총리

채권단과의 줄다리기 끝에 한진그룹이 지원책을 내놓자 정부는 “늦었지만 다행”이라는 입장이다. 1000억원은 주요 항만 하역업체와 터미널에 밀린 대금을 지급하는 데 쓰일 전망이다. 이 돈으로 운항 차질을 빚는 선박에서 화물을 다 내릴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필요 자금이 항만업체와 한진 측의 협상 결과에 따라 달라져 예측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해운업계에선 빠른 해결을 위해 정부와 채권단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본다. 조봉기 한국선주협회 상무는 “시간을 더 지체하면 짐을 맡긴 선주들이 소송에 나서면서 혼란에 빠질 것”이라며 “한진그룹이 먼저 자금 지원에 나섰으니 정부나 채권은행도 긴급 자금을 수혈해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당국과 채권단은 “소요자금 조달을 위해 채권단도 협조할 것”이란 공식입장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한진그룹의 담보가 있어야 한다는 기존의 원칙엔 변함이 없다. 한진그룹의 1000억원으로 급한 불을 끄지 못한다면 채권단과 한진그룹 간에 담보 제공을 둘러싼 핑퐁게임이 되풀이될 여지가 있다.

당장의 물류혼란 고비를 무사히 넘긴다고 해도 한진해운이 처리해 온 연간 460만TEU어치 물량을 어떻게 소화하느냐는 문제가 남아 있다. 정부는 현대상선의 대체 선박 13척을 긴급 투입하기로 했지만 물량 면에서 한계가 크다. 한진해운이 영업을 이어가려면 운영자금이 필요하다. 과연 이 돈을 누가 댈 것이냐가 관건이다. 김우호 해양수산개발원 본부장은 “채권은행이 법정관리 기업에 대한 대출(DIP) 지원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양호 회장이 사재를 출연하고 한진그룹이 한진해운에 자금을 지원하긴 했지만 이 과정에서 정부가 한진그룹을 압박한 건 논란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김창준 법무법인 세경 대표변호사는 “정부에서 법정관리에 들어간 회사의 대주주에게 자금을 지원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법적으로 근거가 없다”고 했다.

기업 구조조정은 외과수술에 비유된다. 곪은 상처를 정밀하게 도려내는 게 핵심이지만 마취와 수혈, 봉합까지 잘 마무리해야 한다. 세계 해운 업계 7위이자 한국 1위인 한진해운을 수술하면서 정부와 채권단은 도려내기에만 급급했다. 문제가 불거졌지만 대책은 한 발씩 늦었다. 결국 구조조정이 원칙과 일관성을 잃고 우왕좌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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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 불’은 껐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한진해운의 공백으로 최소 2~3개월 해상 물류에 상당한 혼란이 일 것이라는 게 해양수산부의 설명이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 경제에는 큰 문제다.

그런데도 해수부는 물론 수출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는 뚜렷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향후 구조조정 본격화에 대비해 무엇보다 ‘컨트롤타워’의 재정비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정부의 자신감과 리더십이 부족하니 그날그날 상황에 따라 흔들린다”며 “경제부총리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컨트롤타워가 확실히 존재해 경쟁력 없는 기업을 퇴출시키고 동시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지원을 잘 엮어 ‘질서 있는 퇴장’을 주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애란·하남현·문희철 기자 aeyan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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