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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30년 전 어느 이른 가을날인가, 지금은 그 기억도·희미한 권태로운 날 오후-.
나는 적십자 병원에 입원해있는 중섭을 찾아 이화의 서대문쪽 뒷문을 나섰다. 내가 봉직하던 예고에서 병원이 지적의 거리인데도 며칠을 지나서야 친구인 중섭을 찾아 병문안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었다.
그러나 이 웬말인가. 중섭의 다정한 모습은 거기 없었고, 유해를 찾는 친지도 없이 시체실에 방치돼 있었다. 화가, 문인, 친구들에게 알렸다.
말이 「예술인장」이지 그냥 몇몇 친구들이 영구를 따라 홍제동 고개를 넘어 화장터로 향하던 것을 기억한다.
박고석 한묵 정규 황염수 유장렬 김영주, 그리고 오영진 김이석 양명문 패상, 이런 이름들이 떠오른다. 화장이었다.
그의 조카 영진을 거쳐 망우리로, 구상을 거쳐 일본의 처자에게로, 일부는 고석의 뒷산으로, 혹은 누군가가 이를 바람에 날렸다.
동경 문화학원때 일이다. 국민 학교 시절에 한반이었던 그가 대학에는 두반 밑으로 들어왔다. 그는 흰 우고상을 언제나 검은 목탄의 선을 긋고 또 그어 범벅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임교수인 석정??는 『너는 흰 석고를 어째서 그처럼 거멓게 그리느냐』고 꾸중하곤 하였다.
나는 오래 두고 이 문제를 생각해 왔다. 중섭에게 있어 검은 석고는 물체를 인식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횐 석고의 「표피성」은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당시 중섭의 아이돌(우상)은 다른 많은 학생들이 그러했듯이 「피카소」와「루오」였었다.
특히 중섭에게는 「피카소」의 신고전주의의 데생과 「루오」의 강한 묵선이 작용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중섭은 이를 그들 서구인들의 차원에서 되풀이하지 않고 우리 조선시대 공장들의 선각과도 같은 소박함과 고구려 벽화에서 느낄 수 있는 장중함으로 되살리고 있다.
그의 주제는 뚜렷하여 조선백자나 고려상감에 등장하는 새와 동자며 ,제주도 바닷가의 그 굶주림 속에서 그는 바닷가를 뛰노는 그의 아이들을 통하여 조선이나 고려의 저 위대한 공장들이 선택했던 전통적 주제와 그 설화를 보았던 것이다.
중섭과 나의 첫 미술과 관련된 기억은 국민학교 4, 5학년 때로 여겨진다. 그가 기거하던 평양 이문리 외가에서 중섭은 나에게 닳고닳은 몽당 수채붓 하나를 보여준 일이 있었다. 물감이 너무 많이 묻었을 때 「몽당붓」을 대면 쪽 빨아먹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억으로 미루어 그의 기법상 숙련도가 아마 나보다 앞서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 집에는 선친(김찬영)께서 남기고 간 화패박스며 말라 굳어버린 뉴톤채색, 커다란 캔버스의 습작들, 또 서가에는 많은 영국미술잡지(Studio)같은 것들이 널려져 있었다. 우리들은 곧잘 이러한 미술책들을 뒤적거렸다.
그 후 그는 오산학교로 진학했고 여기서 오산특유의 민족적 기상을 터득하게 되는데 그러한 오산기질은 두고 두고 그의 예술의 한 특성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느껴진다. 중섭이 취하면 노래부르기를 좋아했고 그의 성대는 일급에 속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성북동 밤길을 행진곡을 부르며 전진하였다.
소나무야 소나무야/변함이 없는 그 빛/비 오고 바람 불어도/그 기상 변치 않으니/소나무야 소나무야/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러한 구절을 마치『오 크리스마스 트리』의 곡조로 편곡, 그는 되풀이 되풀이하여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지금도 내가 사람들 앞에서 부를 수 있는 단 하나의 노래는 이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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