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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병제·격차 해소·사회적 경제 … 진보 트렌드에 합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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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호 4 면

2011년 9월 1일,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의원이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발전적 대북정책을 위한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유연할 땐 더 유연하고 단호할 땐 더 단호함으로써 안보와 교류, 남북 관계와 국제 공조 사이의 균형을 잡아 간다는 점에서 접근 방식이 (이명박 정부와) 다를 수 있다.” 대북정책 구상을 발표함으로써 유력한 대선 후보로서의 이미지를 선점하려 한 것이다. 대선을 1년3개월가량 앞둔 시점이었다.


2017년 대선까지 그 정도가 남은 시기에 새누리당의 잠재 후보들도 각자의 어젠다를 내놓고 있다. 그 경향성을 중앙SUNDAY가 분석했다. 양극화와 실업이 화두인 데다 4·13 총선에서 패한 상황이어서 여당 잠룡들의 지향점도 진보 쪽으로 쏠린 경우가 많았다.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여권에서 가장 진보적인 발언을 쏟아내고 있는 인물이다. 남 지사는 지난 2일 라디오에 출연해 모병제 도입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2025년 신생아가 연 40만 명 이하로 줄어들면 현재와 같은 60만 대군을 유지할 수 없다”며 “정말 (군대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을 군인으로 뽑아 오래 복무토록 해 전문성 있고 강한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모병 군인에게 월급 200만원 수준의 9급 공무원 대우를 해 주면서 25만~30만 명 규모의 병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게 남 지사의 논리다. 남 지사는 모병제에 따른 필요 예산을 연 3조9000억원으로 추산했다.


모병제는 더불어민주당 김두관 의원이 2012년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했을 때 내세운 공약이다. 문재인 전 더민주 대표도 2014년 11월 한 인터넷 카페 회원들과 만나 “군대는 앞으로 징병에 의존할 게 아니라 제대로 처우가 보장된 모병제로 발전해야 한다”고 했다.


남 지사는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수도이전론도 다시 꺼내든 데 이어 사교육 제한과 대기업 규제 관련 정책 구상도 조만간 발표할 계획이다. 남 지사 측 관계자는 “보수정당인 새누리당에선 반발이 나올 수 있다는 걸 안다”면서도 “하지만 요즘 같은 국민 의식 추세에선 정책이 왼쪽으로 가지 않으면 본선 경쟁력이 없을 것으로 보기 때문에 진보적 정책을 구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무성 전 대표도 진보진영에서 나올 법한 발언을 내놓고 있다. 지난달 30일 당내 모임 ‘격차 해소와 국민 통합의 경제교실’을 발족한 게 대표적 사례다. 이 모임은 이날 ‘격차, 중산층 복원과 사회 통합’을 주제로 창립 세미나를 열었다. 김 전 대표는 “대한민국의 오늘을 설명하고 특징짓는 시대 정신은 격차 해소”라며 “갑(甲)질을 당하는 을(乙)들은 양극화를 부추기는 불공정한 게임의 룰에 분노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 당시 “대한민국을 기회주의가 득세하고 정의가 패배한 나라로 기술하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현행 검인정 체계를 비판했던 김 전 대표가 이번엔 ‘대한민국에 불공정한 게임의 룰이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이다. ‘갑질을 당하는 을’은 더민주의 ‘을지로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주로 쓰는 표현이다. 김 전 대표는 “경제 양극화는 정치 양극화로 이어지고 있으며 이를 방치했다가는 나라의 장래가 어렵고 정권 재창출도 이뤄 내지 못할 수 있다”며 “한국식 자본주의 시스템을 뜯어고칠 시점이 됐다”고 주장했다.


김 전 대표의 이 같은 변화는 당내 경쟁자인 유승민 의원이 선점한 ‘진보 영토’를 빼앗으려는 목적도 있다는 분석이다. 중앙일보·한국정치학회가 7월 발표한 ‘20대 국회의원 정책·이념 조사’에서 김 전 대표(이념지수 4.4)는 유 의원(4.9)보다 더 진보 쪽인 것으로 나타났다.


유 의원은 지난해 4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 당시 재벌 개혁과 법인세 개편 가능성을 시사했다. 19대 국회에서 발의했다가 임기 종료로 폐기된 ‘사회적 경제 기본법’을 이번 20대 국회에서 재발의했다. 이 법은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에 대한 정부와 지자체의 기본계획 수립, 사회적 경제위원회와 발전기금 설치, 사회적 기업의 판로 지원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유 의원은 지난달 4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도 “재벌에 계속 혜택을 주는 경제정책을 펴고 복지는 돈 없다고 계속 인색하게 갈 건지, 비정규직은 이대로 좋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갈 건지, 나는 이런 문제에 대해 당이 노선을 확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그는 안보만큼은 보수적 입장을 강조했다. 장승진 국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2010년 무상급식 논쟁 이후 복지와 경제민주화는 유권자들의 트렌드가 돼 있다”며 “박근혜 대통령도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이슈로 내세워 당선됐고, 같은 취지의 슬로건이 이번 대선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란 걸 대선 주자들이 알고 있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도 ‘진보 트렌드’를 따라가고 있다. 총선 패배 후 서울 종로에 ‘공생(공존과 상생)연구소’를 세운 오 전 시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양극화 문제를 비롯해 이른바 격차 해소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준비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 펴낸 책 『왜 지금 국민을 위한 개헌인가?』를 통해 빈부 격차, 사회 양극화, 비정규직, 청년실업, 행복추구권을 주요 이슈로 내세웠다. 이 책에서 오 전 시장은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개헌보다 국민의 기본권 확대와 양극화 해소를 위한 개헌을 해야 한다”며 “양극화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교육 영역에서 보다 구체적인 평등조항이 헌법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원희룡 제주도지사는 주요 정책에 ‘친환경’ 수식어를 붙이며 진보 트렌드에 합류하고 있다. 본인 관용차로 전기차를 이용하는 원 지사는 올해 초 “제주도에 전기차 37만 대를 보급하겠다”는 목표를 발표한 바 있다. 이 밖에 원 지사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양극화 해소, 사회적 대타협, 합의정치가 내가 꿈꾸는 대한민국”이라고 밝혔다.


여당 대선 주자들의 진보 스펙트럼 자리 잡기 경쟁은 새누리당이 4월 총선에 패배한 이후 더민주나 국민의당으로 이탈한 중도층의 표심을 되찾아오기 위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기대대로 될지는 미지수다. 이준석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은 “예전처럼 새누리당 지지율이 40%를 오르내릴 때 가능했던 차별화 전략”이라며 “현재 우리 당 지지율이 20%대까지 내려간 상황에서 각 주자의 세분화된 이념 스펙트럼 전략의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결국 민생이 나아지지 않는 상황에서 집권당의 일부 유력 인사가 진보적 발언을 한다고 해서 우리 당으로 지지세가 넘어올 것 같진 않다”고 덧붙였다.


보수적 가치를 강조하는 주자들도 있다.


나경원 의원은 지난달 본인이 주도해 만든 당내 연구모임 ‘포용과 도전’ 창립총회에서 “신뢰할 수 있는 보수정당의 모습과 포용적 보수의 방법으로 대한민국의 미래 해법을 제시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첫 강연자로 보수학자인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를 초청했다. 나 의원은 또 광복절에 야당 의원들과 함께 ‘국회 독도 방문단’을 꾸려 영토 문제를 강조했다. 다만 나 의원이 국회 저출산·고령화대책특별위원장으로 활동하는 것을 두고 진보적 행보가 혼합돼 있다는 분석도 있다. 장승진 교수는 “저출산 문제에서 나 의원은 애국과 같은 보수 이념보다는 일·가정 양립이라는 진보적 가치에 더 무게를 두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밖에 최경환 의원과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뚜렷한 보수 행보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 탄핵과 관련해 최 의원은 2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우리도 교훈을 얻어야 한다. 재정 여건은 외면한 채 무조건 퍼 주자고만 하는 정치인들이 넘쳐나고 있다”고 적었다. 박근혜 정부에서 기획재정부 장관 겸 경제부총리를 지낸 최 의원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속 가능한 경제정책과 복지”라며 “반(反)포퓰리즘 연대라도 필요한 건 아닌지 우리 모두가 뜻을 모아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성완종 리스트’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홍 지사는 8일 열리는 선고 공판에서 무죄를 받을 경우 본격적인 대선 행보를 시작할 것이라고 새누리당 인사들은 전망했다. 홍 지사는 지난 7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의 각종 막말 논란에 대해 “자기 나라가 처한 현재의 위기 상황과 대중의 불만을 소박한 대중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을 뿐인데 이것을 두고 막말이라고 단정한다”고 말해 향후 보수 주자로서의 행보를 예고했다.


김연명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대선 주자들이 진보나 보수 성향의 이념·정책 스펙트럼을 일찍 드러내면서 1년가량 검증을 받는 것은 유권자를 위해서도 좋고 대선 주자 진영의 전략 마련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학계와 언론의 검증을 통과하는 어젠다는 대선 시즌이 본격화됐을 때 후보 본인만의 브랜드로 자리 잡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선욱기자 isotop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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