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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필름의 혁신 이끈 고모리 시게타카 회장] 하나만 고집해선 살아남을 수 없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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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리 시게타카 후지필름 회장.

일본 도쿄에 본사를 둔 후지필름은 1934년부터 카메라 필름을 만든 ‘필름 회사’였다. 수십년 동안 미국 코닥과 함께 필름 시장을 양분했다. 지금은 아니다. 2000년대 초반 과감한 혁신을 통해 완전히 다른 회사로 거듭났다.

필름 회사 → 화학소재, 화장품, 디지털 기기 회사로 대변신

촬영·인쇄 관련 하드웨어 대신 부가가치가 높은 사무기기 관리 서비스를 파는 데 집중했다. 수십년 간 연구개발(R&D)을 통해 축적한 필름 원천기술을 바탕으로 LCD TV 소재 개발에 뛰어들었다. 필름 원재료인 콜라겐을 활용해 화장품 시장에도 진출했다. 필름 개발 과정에서 20만개 이상 화학 성분을 합성해 본 경험은 의약품 개발에 쓰였다.

혁신의 결과 후지필름은 성공 신화를 써내려갔다. 2000년 1조4000억엔(약 16조원) 규모였던 매출은 지난해 2조5000억엔(약 28조6000억원)으로 불어났다. 영업이익(1900억엔, 약 2조 2000억원)은 역대 최고 수준이다.

같은 기간 54%에 육박했던 필름(이미지) 관련 사업 매출 비중을 지난해 15% 수준으로 줄였다. 후지필름의 부활을 이끈 수장이 고모리 시게타카(古森重隆·77) 회장이다. 그는 1963년 후지필름에 입사해 2003년부터 최고경영자(CEO)를 맡았다.

CEO를 맡자마자 회사의 방향타를 ‘코닥 타도’에서 ‘탈(脫)필름 구조조정’으로 고쳐잡았다. 그리곤 개혁을 가열차게 밀어붙였다. 덕분에 필름 회사였던 후지필름을 현재 모습으로 탈바꿈시켰다. 일본 재계에선 ‘기업 개혁의 선두주자’로 꼽힌다. 본지는 최근 도쿄 후지필름 본사 회의실에서 그를 단독 인터뷰했다.

회의실 한 가운데엔 ‘용기’(勇氣)란 문구가 적힌 액자가 걸려 있었다. “여기 적힌 용기엔 어떤 뜻이 담겼느냐”고 물었다. 그는 “진짜 승부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시작된다. 위기에 빠진 회사를 살리기 위해 어떤 혁신이든 감수할 수 있다는 용기”라고 답했다.

이어 “혁신은 말은 쉽지만 실행하기 어려운 목표다”며 “왜, 어떻게 혁신해야 하는가란 질문에 구성원 누구나가 분명히 답할 수 있어야 올바른 혁신”이라고 강조했다.

후지필름은 필름 회사인가.

“과거엔 그랬지만 이젠 일괄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회사가 아니다. 필름도, 화학소재도, 화장품도, 디지털 기기 회사도 아닌 ‘멀티플’(multiple·복합적인) 회사다. 고객의 수요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하려 노력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다. 후지필름뿐 아니라 철강사든, 자동차 회사든 많은 기업이 이제 하나만 고집해선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다.”

혁신을 통해 거듭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눈앞의 이익에 집착하다가는 회사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혁신 바람을 불러왔다. 혁신 과정에서 첫째, 줄여야 할 사업을 접었다. 디지털 시대에 밀린 필름 사업이 그것이었다. 둘째, 새로 도전해야 할 사업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한 후 선택했고, 밀어붙였다. 우리가 잘 해왔고, 잘 할 수 있는 건 필름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더 이상 끌고갈 수 없다면? 우리는 필름 기술을 최대한 활용해 살아남기로 했다. LCD 소재와 화장품, 디지털 기기 같은 대안이었다.”

카멜레온처럼 변신을 거듭해온 후지필름 혁신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곳이 본사 3층에 있는 ‘오픈 이노베이션 허브(Open Innovation Hub)’다. 2014년 1월 창사 80주년을 기념해 만들었다. 이곳에선 필름 소재와 의약품, 화장품 등 후지필름의 사업 아이템 50여개를 전시하고 있다.

예비 창업가나 기존 사업자들이 후지필름 기술을 시연해 볼 수 있고 직접 제휴 관계를 맺기도 하는 사업 무대다. 인터뷰 직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 이 회사가 만든 LCD 소재를 적용한 TV 화면과 적용하지 않은 화면을 비교하는 시연이 한창이었다. 후지필름 LCD 소재를 적용한 화면은 한 눈에도 화질이 또렷했다.

이 소재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자 격자무늬가 선명했다. 기존 주사를 대체한 ‘도장 주사’ 기술도 체험했다. 현미경으로 볼 수 있는 바늘이 촘촘히 박혀있는 패치를 피부에 붙이면 주사액이 체내로 녹아서 들어가는 식이었다. 역시 필름 기술을 활용한 제품이다.

안내원은 가로세로 길이가 각각 10cm, 두께가 3cm인 사각형 테이프 상자를 들어보이며 ‘차세대 친환경 저장장치’라고 소개했다. 이 저장장치엔 15TB(테라바이트, 1TB는 1024GB) 데이터를 담을 수 있다. DVD 3000장 분량이다.

혁신을 밀어붙일 때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인가.

“리더의 야성이다. 기업 환경이 좋지 않을수록 새롭고 독창적인 상품을 만들어 기업 내부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 리더의 의무다.”

혁신엔 구조조정이 따른다.

“직원의 아픔을 수반하고 돈도 필요한 일이다. 후지필름은 5000명을 줄였다. 그 과정에서 직접 나서 끊임없이 설득했다. 직원들에겐 충분한 퇴직금을 줬고, 더 이상 영업을 할 수 없는 판매점에겐 영업권을 사들였다.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인건비는 계속 발생하지만 퇴직금은 일시적이다. 살아남기 위해 치르는 비용이라 아깝지 않았다.

과장급 이상 전 직원을 상대로 왜 우리가 필름을 버려야 하는지, 왜 새로운 사업에 투자해야 하는지부터 상세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모든 직원과 함께 하는 것이 제일 좋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할 상황이다. 그렇다면 어떤 분야를 잘라내고 어떤 분야를 늘리는 구조개혁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설득했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구조조정은 피도 눈물도 없는 ‘드라이’(dry·메마른)한 구조조정은 아니었다.”

당신의 리더십은 무엇인가.

“세계에서 일어나는 정보를 빨리 파악해 정확하게 읽어내는 것, 이걸 바탕으로 예측하는 리더십이다. 이런 능력이 전제되지 않으면 카리스마가 있어도 구성원들을 따라오게 할 수 없다. 하나 더 꼽자면 주변에 대한 사랑이다. 가족·회사·국가에 대한 사랑, 나아가 인류에 대한 사랑이 나의 리더십의 요체다.”

직장인의 꿈은 임원이라고 한다. 사원으로 출발해 회장에 오른 비결은 무엇인가.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조직원이다. 사원·과장·부장일 때 맡은 일을 확실히 수행했을 뿐이다. 멀리 보지 않고 단계별로 어떡하면 내가 맡은 일을 잘 할 수 있을지, 경쟁사는 어떻게 이길 수 있을지 해결책을 찾아왔을 뿐이다. 회장도 마찬가지다. 다만 ‘무조건 이기면 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페어 플레이를 하려고 했다.”

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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