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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웨이 ‘직구’…오늘 패션쇼서 본 그 옷, 내일 매장 가서 바로 쇼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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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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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2.22 런던 켄징턴가든서 버버리 패션쇼

지난 2월 22일 영국 런던 켄징턴가든에서 열린 럭셔리 브랜드 버버리의 패션쇼. 이날 쇼에는 캐시미어 밀리터리 코트, 뱀피 가죽 트렌치코트 등 신상품 컬렉션을 입은 모델 56명이 런웨이에 섰다. 그리고 놀랍게도 바로 다음날 런던 번화가인 리젠트 스트리트에 있는 버버리 플래그십 스토어에 전날 런웨이에서 선보인 외투와 핸드백·구두 등 신상품이 디스플레이됐다.

버버리·마이클 코어스·코치…
6개월 걸리던 생산~유통 주기
‘즉시 판매’로 고객 늘리기 나서
“런웨이는 창의성 보여주는 작업?
루이비통·샤넬·구찌는 전통 고수
새 패션질서 확산 아직 미지수

사흘 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럭셔리 브랜드 프라다의 2016년 가을·겨울(FW) 패션쇼도 비슷했다. 미우치아 프라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총 52개의 스타일을 선보였는데, 이 가운데 핸드백 신상품 두 종류는 쇼가 끝난 직후 밀라노·파리·런던·뉴욕의 주요 매장 9곳에서 곧바로 판매에 들어갔다. 앞서 뉴욕에서 패션쇼를 연 마이클 코어스도 런웨이에서 선보인 핸드백과 구두·의상 일부 제품을 쇼가 끝나자마자 맨해튼의 플래그십 스토어와 온라인에서 판매했다.

버버리와 프라다, 그리고 마이클 코어스의 행보가 보여주는 건 ‘패션 캘린더의 변화’라는 구절로 요약할 수 있다. 반세기 넘게 이어져 온 전통적인 ‘패션 캘린더’가 흔들리고 있다는 얘기다. 패션쇼를 본 바이어들이 주문을 내고 제조와 유통을 거치는 데 6개월쯤 소요된다. 그런데 버버리 등 많은 럭셔리 패션 하우스가 그 기간을 획기적으로 줄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미 많은 유명 디자이너가 전통적인 패션 주기를 따르지 않겠다고 잇따라 선언했다.

버버리 CEO "시즌 간 경계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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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2.23 런던 리젠트 스트리트의 버버리 매장

변화는 올 초에 예고됐다. 럭셔리 브랜드 가운데 처음으로 버버리가 컬렉션의 생산, 패션쇼 운영 및 제품 판매 방식을 바꾸겠다고 발표했다. 당장 이달 19일 열리는 패션쇼부터는 쇼가 끝나자마자 모든 상품을 즉시 전 세계 버버리 매장에서 구매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이다. 크리스토퍼 베일리 버버리 최고경영자(CEO) 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시즌 간 경계가 없어지고 소비자 욕구가 보다 즉각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며 “런웨이쇼와 매장 경험을 더욱 가깝게 연결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방식의 패션쇼에 대한 욕구는 뉴욕에서도 찾을 수 있다. 패션 디자이너 톰 포드는 지난 2월 쇼를 아예 취소하고 한 시즌 쉬었다. 이달 중순 열리는 뉴욕패션위크에서 올 가을·겨울 컬렉션을 선보이고, 곧바로 모든 상품의 판매를 시작하기 위해서다. 그는 취소를 발표하면서 “제품이 매장에 나오기 몇 개월 전에 컬렉션을 보여주는 현재의 방식은 구시대적이고 더는 통하지 않는다”며 “고객들은 패션쇼에서 나온 컬렉션을 즉각 구매하고 싶어한다”고 바뀐 전략의 이유를 설명했다.

새로운 패션 질서는 런웨이의 상품을 즉시 구매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시 나우 바이 나우(see now buy now)’로 불린다. 마이클 코어스, DVF, 타미 힐피거, 코치도 이번 시즌부터 패션쇼가 끝나자마자 모든 상품을 온·오프라인 매장에서 판매할 계획이다.

디지털 기술 발전이 바꾼 풍경

런웨이에서 매장까지의 시간이 줄어든 이유는 달라진 소비자 입맛뿐만 아니라 디지털 기술의 발전도 한몫한다. 일부 브랜드는 패션쇼를 온라인으로 생중계하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새 컬렉션 이미지를 대거 유통시킨다. 젊은 잠재적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 덕분에 런웨이와 대중 간의 거리는 줄었다. 버버리는 2009년부터 패션쇼를 생중계하고 있다. 베일리 CEO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생중계를 하기 전까지 패션쇼는 일종의 업계 내부 행사였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며 “패션쇼의 관람객은 (일반 대중으로) 완전히 바뀌었으며 우리는 이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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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7일 열린 마이클 코어스 패션쇼(왼쪽)와 쇼 직후 뉴욕 매장에서 판매된 ‘줄리 카메라’ 백. [사진 각 브랜드]

인터넷으로 컬렉션을 실시간 공개하면서 6개월 후 상품을 출시하는 게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미지가 활발하게 유통될수록 역설적으로 컬렉션에 대한 신선도가 떨어지는 문제가 생겨난 탓이다. 영국 디자이너 후세인 샬라얀은 CNN에서 “이미지가 과포화돼 정작 제품이 매장에 깔리는 시점이 되면 신상품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싫증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경기 침체 분위기 속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배경도 있다. 마이클 코어스는 자료를 통해 “고객들은 더 이상 시즌 개념으로 패션에 접근하지 않고 지금 본인에게 필요한 게 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따진다”며 “런웨이에서 점찍어둔 제품을 바로 구매해서 옷장에 챙겨둘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내 생각”이라고 말했다.

카피 룩 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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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5일 열린 프라다 패션쇼(왼쪽)와 쇼가 끝나자마자 판매된 ‘카이에’ 백. [사진 각 브랜드]

럭셔리 브랜드 입장에선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대량 주문을 내는 방식보다 재고 관리에서 확실히 더 유리하다. 판매 추이를 봐가면서 시즌 중에 주문을 조정하는 시스템이 정착하면 수량 예측이 정교해져 낭비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패션 캘린더의 변화는 중저가 패션 브랜드에는 적지 않은 타격을 줄 수도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런웨이에서 매장까지의 시간차를 활용해 런웨이 디자인을 카피한 후 훨씬 싼값에 내놓는 일부 패스트패션 브랜드와 로컬 브랜드가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부에선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마이클 버크 루이비통 CEO는 FT와의 인터뷰에서 “런웨이에 보이는 상품은 어차피 전체 매장 상품의 5~10%에 불과하다”며 “루이비통에 런웨이쇼는 상품에 관한 것이 아니라 창의성을 발휘해 흥미로운 것을 보여주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각 브랜드가 지금보다 더 사적이고 은밀한 패션쇼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빅터 루이스 코치 CEO는 “바이어와 스타일리스트를 위한 소규모 프레젠테이션이 은밀하게 자주 열리고 대중을 위해서는 그것들을 모두 합친 스펙터클한 쇼를 열 수도 있다”고 예측했다.

무엇보다 아직까지는 런던과 뉴욕을 중심으로 일부 브랜드가 동참했을 뿐 파리·밀라노의 주류 패션하우스들은 전통 패션 캘린더를 고수하고 있다. 지난 2월 시범적으로 핸드백 두 종류를 즉석에서 판매해 본 프라다도 영구적으로 사이클을 바꿀지에 대해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하지 않았다. 완전히 새로운 패션 질서가 형성될지, 소수의 ‘반란’이 될지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박현영 기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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