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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음 발행지 없어도 유효 | 잇따른 "무효" 뒤엎고 새 판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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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발행지가 기재 안된 약속어음도 유효하다는 새 판결이 나왔다.
지금까지 민사소송에서 발행지가 기재 안된 당좌수표·약속어음은 무효라고 일관되게 판결해 왔고 형사사건에서만 당좌수표의 경우 발행지가 기재되지 않았더라도 유효 수표로 인정, 부도를 내면 형사 처벌을 해 왔다.
이 판결은 지금까지의 확립된 판례를 뒤엎고 거래 관행을 중시, 어음법·수표법의 발행지 기재 요건을 폭넓게 해석해 어음·수표 등의 선의의 취득자를 보호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으며 이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될 경우 같은 내용으로 소송 중인 많은 사건에 영향을 주게 될 뿐 아니라 수표 어음의 거래 질서 확립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서울민사지법 항소 5부 (재판장 김신택 부장판사)는 9일 김연학씨(40·서울 장안 2동 349)가 어음 발행인 성흥수씨(43·안양시 천일슈퍼 대표)를 상대로 낸 약속어음금 청구 사건 항소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던 원심을 깨고『어음 발행인인 피고 성씨는 원고 김씨에게 어음금 5백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원고 김씨는 84년 9월 거래선인 이모씨로부터 성씨가 발행한 천일슈퍼 명의의 5백만원짜리 약속어음을 받고 은행에 지급 제시했으나「발행지 기재가 안됐다」는 이유로 지급 거절되자 소송을 냈었다.
1심인 서울지법 동부지원은 지난해 8월『어음법상 명기된 요건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무효』라며 종전 판례대로 원고 김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발행지 난에「안양」이란 행정지역 명칭이 없는 것은 사실이나 지급 장소가 경기은행 안양지점으로 되어 있는 등 발행지를 유추할 수 있는 데다 발행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원고 김씨가 선의의 취득자임에 틀림없으므로 이 어음은 유효하다고 봐야 한다』고 원고 승소 이유를 밝혔다.
재판부는 또 『지금까지 민사사건에서 발행지가 기재 안된 수표·어음은 무효이므로 지급할 의무가 없다고 일관되게 판결해 왔지만 일반적으로 발행지를 기재하지 않고 유통되고 있는 거래 관행을 중시, 선의의 취득자를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받아보기 위해 새 판결을 내린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김교창 변호사는『발행지 기재 요건이 어음·수표 유통에 거의 문제가 안되고 있는데도 종전의 판례는 법률적 요건을 고집, 별 생각 없이 어음을 받았던 사람이 뜻밖에 피해를 보는 일이 많았던 현실에 비추어 이번 판결은 궁극적으로 법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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