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기금 1억 1천억 놓고 당정 줄다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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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민정당서 난색표시>
○…정부와 민정당은 국제원유가 하락으로 조성될 석유사업기금 1조 1천여억원을 「어떻게 쓰느냐」는 문제를 둘러싸고 줄다리기를 하고있다.
주관부인 동자부는 모처럼 생긴 큰돈을 헛되게 쓰기보다는 산업 체질강화 및 에너지 관련산업에 효율적으로 쓰자는 입장이고 민정당은 국민들에게 보다 피부에 느끼는 방향으로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정부의 기금사용계획을 재검토하자는 주장을 펴고있다.
정부는 지난달 30일 석유사업기금 운영심의위원회(위원장 동자부 차관)를 열고 석유사업기금의 사용계획안을 통과시켰다. 정부 각 부처가 서로 더 많이 쓰겠다고 씨름을 벌였던 예민한 문제라 그 내용은 아직도 「대외 비」로 되어있다.
연말까지 국제 원유가가 배럴 당 15달러를 유지할 경우 이미 조성된 5천 8백억원을 포함, 1조 1천억원의 석유사업기금이 조성될 것으로 보고 이를 원유비축·산업체질강화·에너지절약시설투자·한전·가스공사의 외화표시자금 대환·유전개발 등에 쓰겠다는 줄거리만 밝혀진 상태다.
그러나 정부의 이 같은 기금운영계획은 지난달 31일 당정협의에서 민정당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쳐 「재검토」 딱지가 붙여져 되돌아왔다.
민정당은 『정부 연간예산의 10%나 되는 거액을 충분히 검토할 시간도 주지 않고 회의당일 자료를 제출해 합의를 얻어내려는 것은 무리』며 시간을 갖고 재검토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민정당은 행정부 쪽에서 마련한 안에 대해 『국민에게 직접적으로 돌아가는 혜택이 하나도 없다』며 난색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석유 수입가격은 배럴 당 13달러 8센트인데 관세 및 기금으로 11달러 17센트를 정부가 떼어 갖고 국내유가는 한푼도 안 내려 국민들이 실제보다 훨씬 비싼 석유를 쓰게되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는 것.

<대외비로 여론 뒷전>
○…경제기획원·상공부·재무부 등 각 부처와 민정당이 서로 자기네 뜻대로 쓰겠다고 덤비는 석유사업기금은 여러 가지 가정이 전제된 가공의 숫자다. 현재 손안에 있는 돈이 아니다.
전제조건은 유가가 배럴 당 15달러를 유지하고 국내유가는 더 이상 내리지 않아야 한다.
또 자금압박을 받는 정유회사들의 요구에도 불구, 기금 징수유예를 해주지 않을 때 1조 1천억원이 조성된다. 상황변화에 따라 조성액은 큰 차이가 생긴다.
그러나 정부는 정유회사가 원유를 정제한 뒤 팔아 돈을 회수하기도 전에 통관할 때 미리 기금을 내야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생기는 자금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3개월 정도 기금징수를 미뤄 줄 계획이다.
정유회사가 한 달에 내야하는 기금액수는 약 1천억원 정도인데 3개월간 기금징수 유예조치를 해주면 당장 올해 기금조성목표에서 3천억원 정도 펑크가 난다는 계산이다.
그런데도 각 부처는 돈이 수중에 있는 것처럼 아우성을 쳤다.
심지어 기금운영계획이 확정도 안된 상태에서 산업구조 조정·중소기업 지원·기술향상 지원자금·통화안정증권 매입 등 계획을 멋대로 발표, 주무부처인 동자부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또 동자부는 가장 효율적으로 기금을 쓰기 위해 널리 의견을 들어야 할 텐 데도 실무자 몇 명이 철저히 보안을 유지해 가며 비밀리에 작업, 계획안을 만든 뒤 민정당에 제출할 때도 「대외비」를 요구하는 등 보안에만 신경을 썼다.
당연히 여론을 수렴하고 중지를 모아야할 사안임에도 쉬쉬 해가며 서로 김칫국부터 마시겠다고 나서는 꼴이다.

<우선권 놓고 아직 마찰>
○…기획원과 동자부는 기금 사용계획에는 어렵게나마 합의했으나 기금사용의 우선권을 놓고 아직도 마찰을 빚고 있다.
1조원을 넘는 돈이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연말까지 거둬야 하는 것이므로 서로 먼저 쓰자는 것이다.
주무부처인 동자부는 원유 비축·에너지 절약시설 투자 등에 우선 쓰자는 데 반해 기획원은 산업구조 조정 등에 먼저 쓰자는 주장이다.
석유비축을 당장 할 필요도 없고 에너지 절약시설 투자는 그렇게 급한 것이 아니므로 산업체질 강화 등에 우선 써야한다는 것.
동자부는 그러다가 원유가격이 다시 오를 경우 기금은 바닥이 날텐데 그때 가서 무슨 돈으로 원유비축을 하고 에너지 절약시설투자를 하겠느냐며 에너지 산업에 우선 쓰자는 입장이다.
유가하락으로 생긴 이 횡재(?)의 재원을 어떻게 배분, 효율적으로 쓰는 것은 각 부처나 당의 이해관계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고 국가경제의 기틀과 관련되는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대국적이고 현명한 사용계획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이석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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