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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에도「필리핀 바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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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마닐라는 칠레에도 있다.』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한 주거지역 담벼락에 주민들이 써놓은 문구다. 군사정권의 철저한 탄압 속에 침묵하던 야당도 이제는『독재와 민주주의를 양자택일 할 때』라고 공공연히 나서고「제복조의 폭력」에 움츠러들었던 청년·학생들도 더 이상 겁을 먹지 않고 투석전을 벌이는 등 대항하고 있다.
지난 73년부터 13년간 계속되고 있는「피노체트」(70)의 군사정권 수명이 다해가고 있다는 증상들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가운데 민주화에 대한 청신호들이 이처럼 하나 둘 구체화되고 있다.
이른바 「필리핀 신드롬」(필리핀 증후군)으로 불리는 친미 독재국가 민주화의 3대 요소, 즉 ▲민주화에 대한 미국의 적절한 압력 ▲독재권력의 수단이었던 군의 엄정 중립과 민주화에 대한 군의 자각 ▲독재권력을 대체할 수 있는 민주세력의 수권능력과 수권투쟁의 세 가지 요소가 현재 칠레에서는 어느 정도 충족되어 가고 있다.
민주화에 대한 이 3개 요소 중 가장 극적이고 실현에 어려움이 따르며, 그래서 독재정권에 가장 치명적인 것은 필리핀의 예에서 보듯 군의 자각이다.
칠레 군부의 이러한 동향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 것은 현재 군사평의회 위원이며 해군참모총장인「호세·토리비오」제독의 지난3월 발언.
그는 지난해 12월까지만 해도 89년까지「피노체트」의 집권을 가능케하고 의회를 구성하지 못하게 한 현행 헌법을 충성을 다해 지키겠다고 발언했었다. 그러나 지난3월 그는『우리는 현행 헌법을 무조건 개정해야 한다』고 입장을 바꾸었다.
공군사령관「페르난도·마타이」도 최근 미라지-50전투기 14대, F-5E전투기 13대등 칠레 공군의 주화력을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 끝의 푼타 아레나스 공군기지로 이동 시켰다. 명목상으로는 민간 항공기가 비행훈련을 방해하며 아르헨티나와 분쟁중인 비글만에 군사력을 강화한다는 것이지만 이곳 소식통들은「피노체트」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으로 보고 있다.
육군장성들 사이에서는 점진적인 민주화 가능성을 논의하는 비밀문서가 돌아다니고 있는 것으로 칠레의 한 주간지는 전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군부의 자각에는「피노체트」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민주화 압력, 재야 민주세력과 1천2백만 칠레인의 90%에 달하는 가톨릭 신도들의 정신적 지주「환·프레스노」추기경의 꾸준한 민주화 요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야당세력을 주도하고 있는 기민당의「가브리엘·발데스」는 벌써 국민들 사이에「코리」라고 불리고 있다.
아직 합법적인 정당활동이 금지돼 있는 상태지만 11개 야당과 가톨릭 단체들은 지난해 8월「완전한 민주주의로의 복귀를 위한 국민협정」을 발표, 범국민 저항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칠레의 인권탄압에 침묵하거나 두둔하던 미국은 지난3월 유엔인권위의 대 칠레 비난결의안에 적극 찬성, 종래의 입장을 바꾸었다.
물론 미국의 대 칠레 민주화압력에는「피노체트」를 어떻게「명예퇴진」시키느냐의 고민이 있다.
필리핀 민주화에 이어 민주화의 필요충분조건 들이 하나씩 충족되어가고 있는 칠레는 지금 계절적으로 겨울에 접어들고 있지만「산티아고의 봄」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유재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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