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책 속으로] 500만 명 피로 얼룩진 중국 황금시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기사 이미지

해방의 비극
프랑크 디쾨터 지음
고기탁 옮김, 열린책들
528쪽, 2만5000원

비밀경찰 보고서 등 최근 자료 활용
쿼터제로 사람 죽인‘해방’ 진실 폭로
농민·관료·지식인 다양한 증언 바탕
중국 현대사의 왜곡된 환상 벗겨내

중국에 대한 서구 사람들의 관심은 『해방의 비극』이 출간된 배경의 한 축을 이룬다. 서구인들은 그들의 미래를 상당 부분 중국이 결정한다고 본다. 중국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한국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당장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를 둘러싼 갈등을 겪고 있다.

그럼 중국 송·원·명·청 시대의 역사를 아는 게 오늘의 중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아니면 60여년 전의 중국을 이해하는 게 한·중 관계의 오늘과 내일을 조망하는 데 쓸모가 있을까.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볼 수도 있다. 1990년 한국과 중국에서 태어난 26세 청년은 각기 고려 때, 송나라 때 조상보다는 오히려 서로 더 닮은 모습과 의식 구조로 2016년을 살고 있다. 하지만 어제의 역사는 ‘오늘의 무의식’이다. 자국 역사 읽기는 우리의 무의식, 남의 나라 역사 읽기는 남의 무의식을 들여다 보는 것이다.

중국의 혁명기는 중국이라는 나라의 무의식에서 ‘새내기 층(層)’을 구성한다. 어떤 기억이 담겼을까. 최근세사를 기록하는 것은 까다롭다. 아직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생존해 있다. 고대사에 비해 자료도 ‘지나치게’ 많다. 홍콩대 프랑크 디쾨터 인문학 석좌교수가 3부작으로 혁명시대 중국을 해부하는 이 난제에 도전했다. 『해방의 비극』은 인민 3부작의 첫 번째 책이다.

기사 이미지

1956년 1월 15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열린 ‘성공적인 사회주의 개조’ 기념 행사에서 상공업 대표 웨쑹셩(왼쪽)이 저우언라이 공산당 총리(왼쪽 둘째)와 마오쩌둥 국가주석에게 붉은 봉투를 건네고 있다. 『해방의 비극』을 통해 그간 공개되지 않았던 문서와 자료들을 대거 만나볼 수 있다. [사진 열린책들]

디쾨터 교수는 비밀경찰 보고서, 지도부 연설문, 사상 개조 운동 당시의 자백서, 농촌 반란 실태 조사서, 대공포 시대 희생자 통계 자료 등 최근 공개된 수백 개 문건들을 활용했다. 또 증언에는 노동자·농민·관료· 지식인 등 각계 각층 사람들이 등장한다.

저자의 연구 결과는 통념과 신화를 깬다. 서구 학계 통념은 해방기인 이 시기(1945~1957년)를 적어도 상대적인 ‘황금시대’로 이해했다. 제2차 국공내전(國共?戰, 1946~49) 이전과 대약진운동(1958~61)·문화혁명(1966~76) 시기에 비하면 그리 나쁘지 않은 시대였다는 것이다. 이 중간기에서 분열과 혼란의 극복, 새로운 중국의 건설이 시작되고 인민은 어느 정도 개인적 자유를 누린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한국전쟁에서 300만 명이 참전해 40만이 사망했지만 이 시기를 거치며 중국이 국제적인 위상을 되찾기 시작한 것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디쾨터 교수가 정의한 해방기는 ‘계산된 테러와 체계적인 폭력’의 시대, 500여만 명이 사망한 야만의 시대였다. 부패도 그때 이미 시작됐다. 해방은 없었다. 새로운 예속, 새로운 농노제가 시작됐을 뿐이다.

중국 공산당의 ‘해방자’들은 ‘선과 악’의 구도로 해방에 임했다. 쿼터를 정해 1000명에 2명, 4명 하는 식으로 반혁명 세력을 처단하는 게 적절하다고 봤다. 불태워 죽이거나, 산 채로 매장했다. 지주 계급은 사악한 계급이었다. 지도부는 중국 인구의 10%가 지주·부농이라고 봤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지주라고 할 만한 계층은 당시 중국에 없었다. 지주나 소작농이나 비슷비슷하게 가난했다. 자신들과 처지가 비슷한 지주들에게 린치를 가하는 것을 거부하는 농민들도 있었다. 해방자들은 지주가 없는 곳에서 지주를 만들어야 했다. 구원(舊怨)이 지주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다.

중국 해방기의 역사는 왜 ‘왜곡’됐을까. 우선 서구 지식인들이 이상주의의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능하면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두둔하려고 했다. 또 학살이 자행되던 50~60년대에 중국을 방문할 수 있었던 학자들은 극소수였다. 이후 소련·동구권의 붕괴로 냉전이 끝나자 특히 중국에 호의적인 이념적인 방패막이 사라졌다. 『해방의 비극』은 그러한 흐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S BOX] 장제스 차로 베이징 입성한 마오

저자에 따르면 마오쩌둥(毛澤東)은 장제스(蔣介石)가 1930년대 타고 다니던 디트로이트산 리무진을 타고 베이징에 입성했다.

오늘날 중국이 G2가 된 것은 마오 덕분이라는 주장이 서구에서도 나오고 있다. 중국 입장은 마오의 공과(功過)를 따진다면 그가 70% 잘했고 30% 잘못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100% 잘못했다고 본다.

책에 따르면 처음부터 과오가 많았다. 마오는 특히 소련에서 빌려온 ‘지주, 부농, 중간 농민, 빈농, 농업 노동자’라는 농촌 사회 구조를 무리하게 중국에 적용했다.

마오는 마르크시즘을 중국에 맞게 혁신한 레닌·스탈린 보다 우월한 사상가로 미화됐다. 하지만 저자에게 마오는 레닌이 고안한 조직적 테러의 충실한 모방자에 불과하다. 소련의 지원에 의존하고 스탈린의 지침에 충실히 따랐다는 것이다.

김환영 논설위원 whanyu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