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황순원문학상] ① 황순원문학상 예심위원들의 릴레이 심사평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기사 이미지

인간 정산
-김숨 '읍산요금소'('한국문학' 2015년 가을호)

‘삶은 길이다.’ 이 상투적이면서도 유력한 비유를 따른다면, 톨게이트는 한 인간의 일생을 정산하는 명부전(冥府殿) 같은 곳이 될 것이다. 인간이 이 지점에서 얼마의 요금을 지불하게 될까. 아마도 생의 정산표는 타자와의 채무, 채권, 어음, 부도수표, 이자계산서 등이 복잡하게 기록된 용지가 될 것이다. 그런데 소설 '읍산요금소'에서 중간정산을 요구하는 이는 요금소 직원이 아니라, 매번 통과해갔다가 돌아오는 이상한 통행자다. (요금소 여직원의 기억을 신뢰한다면) 20분 간격으로 돌아와 똑같은 길을 묻는 그랜저 승용차의 운전수는 마침내 그녀에게 이렇게 묻는다. “가봤어요?” “폴란드모텔.” “바뀌었던데. 폴란드모텔에서 드림모텔로.” “가본 지 한참 되나 봐요.” 이 때 삶을 중간정산 당하는 이는 운전자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다.

읍산요금소는 죽음의 “풀코스”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요금소를 지나자마자 요양원이, 그 뒤를 이어 화장터와 납골당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저 죽음의 동선(動線)을 지키는 유령 같은 이는 누구인가. 이 소설은 톨게이트 계약직 정산원으로 일하고 있는 한 이혼녀의 황량한 삶만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가 죽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하이패스’로 질주하는 삶이라는 것을 그녀의 막다른 자리가 알려준다. 김숨이 보여주는 숨 막히는 강박성은 우리를 압도한다. 생활은 단조로운 반복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을 이은 삶은 불가지, 불가해로 아득하다.

그런데 마지막 지점에서 묘한 반전이 발생한다. 그녀는 지금은 폐쇄된 구 읍산요금소에서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다가, 지금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런데 이곳 이름도 읍산요금소였던 것. 그렇다면 이곳도 현실에서는 폐제(廢除)된 장소, 삶의 형식을 부여받지 못한 채 죽음 쪽에 더 가까운 공간이 아닌가? 그녀는 구 요금소에서 “멸치 눈알처럼 쪼그라든 검은자위를 텅 빈 도로에 고정”시킨 채 “닭 벼슬” 같은 붉은 입술을 다문 여인을 추억하곤 했다. 이곳 이름이 읍산요금소라면, 그 여인이 어쩌면 그녀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 놀라지 마시라.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요금소를 향해 오는 저 검정색 그랜저에 공포를 느낀다면, 우리 자신이 저 요금소 부스에 앉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 앞에서 삶은 놀랍도록 공평하구나. 누구나 공포를 나누어 가졌으니.

복수/애도라는 이중나선
-권여선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창작과비평' 2016년 여름호)
비극은 언제 탄생하는가? 주어진 운명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인간의 노력이 그 운명을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게 밝혀질 때다. 권여선의 이 소설을 그런 의미의 비극이라도 해도 좋을 것이다. 권여선의 비극은 오해에서 시작해서 파국으로, 복수로 시작해서 애도로 진행된다. 소설은 치정극의 분위기를 풍기면서 시작된다. 열아홉 살 ‘미모의 여고생’ 김해언이 공원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다. 해언은 급우인 신정준의 차를 탄 것이 목격된 후로 행방불명된다. 치킨 배달을 가던 급우 한만우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지만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다. 그 과정에서 미모로 넘버 투였던 급우 윤태림이 만우의 오토바이에 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해언이 죽은 후, 해언의 여동생 다언은 만우를 의심해서 찾아가지만 그가 누군가를 죽일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정준은 유학에서 돌아와서 태림과 결혼하고, 이번에는 둘 사이에서 낳은 딸아이 예빈이 납치된다….

사건의 전모는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우리는 태림의 누설(“그애는 자기 머리를 벽에 부딪쳐서…두부 손상으로 사망했어요.” “죽을 때까지 부딪쳐서 그렇게…아무리 묶여 있었다고 해도……그렇게 독하게…”)과 다언의 통화(“혜은이는요, 엄마?”)를 통해 그 사연을 짐작할 수 있다. 해언이 죽은 후 엄마는 (이미 죽은) 그녀를 태어났을 때 붙이려고 했던 이름인 ‘혜은’으로 바꿔 부른다. 그 혜은이 실제로 집에 있으니, 저 아기의 옛 이름은 예빈일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치정극에 이은 복수극처럼 보이지만, 작가는 울림이 큰 문장으로 이 비극을 다른 곳으로 인도한다. “어떤 삶은 이유 없이 가혹한데, 그 속에서 우리는 가련한 벌레처럼 가혹한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우연과 무의미를 필사적으로 넘어서려는 인간의 노력이 또 다른 무의미를 낳을 때, 그것은 비극의 깊은 울림을 낳는다. 이 울림의 정서가 애도다. 시점의 교차가 만들어내는 다면적인 고백 역시 애도의 형식이다. 이런 어긋남을 통해서만, 우리는 타인을 진정으로 만날 수 있다.

이 소설에는 두 개의 무지가 있다. “내용 없는 텅 빈 형식의 완전함”을 지녔던 해언(그녀는 이른바 백치미의 화신이다)과 가난과 무지로 인해 수난을 겪은 만우(그 역시 죄 없이 수난담의 주인공이 된다)가 그렇다. 속옷도 없이 벌어진 해언의 무릎과 골육종으로 절단된 만우의 무릎. 전자가 유혹의 상징이 아니듯, 후자 역시 천형의 흔적이 아니다. 이 틈새로 삶과 죽음을 포괄하는 무한이 가시화된다. 그 무한에, 무한의 비극성에, 우리는 이렇게 경배를 바쳐야 한다. “섭리가 아니라 무지예요! 이 모두가 신의 무지다, 그렇게 말해야 해요! 모르는 건 신이다, 그렇게……” 세월호의 아이들을 애도하는 수많은 소설들 중에서, 권여선의 이 소설이 탁월한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는 것은 분노와 애도가 이렇게 속절없이 한 몸일 수 있다는 것을 지극히 아름답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기사 이미지

◇양윤의
문학평론가. 서울 출생.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
2006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평론집 『포즈와 프러포즈』.
현재 고려대·국민대 출강.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