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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일제의 적은 무능한 장군들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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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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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육군
호사카 마사야스 지음
정선태 옮김, 글항아리
1136쪽, 5만4000원

국익·애국 정의 독점한 쇼와 군부
승리에 중독돼 법까지 깔아 뭉개
문·사·철 안 배운 사관학교 출신들
병사를 소모품 삼아 학살행위 자극

정치인과 외교관이 군인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힘으로 작용해야 파국을 막을 수 있다. 전쟁 전에도 전쟁이 일어난 다음에도. 프랑스 정치가 조르주 클레망소(1841~1929)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은 장군들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중요하다.” 물론 반대 의견도 있다. 국방과 전쟁을 민간인에게 전임하면 안 된다.

태평양 전쟁 당시의 일본 육군을 입체적으로 해부한 『쇼와(昭和) 육군』은 클레망소의 말이 맞는다는 것을 확인한다. 『쇼와 육군』은 국익이나 애국의 정의를 군부가 독점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일본 인구의 6%에 해당하는 500만 명이 전화로 사망했다.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는 정치와 언론, 심지어는 법까지 발아래 두고 있던 일본 군부의 실상을 드러낸다. 창군 이래 일본 육군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막강하게 성장했다. 승승장구하며 승리에 중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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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전범재판) 법정에 일본 A급 전범들이 앉아 있다. 앞줄 맨 왼쪽의 도조 히데키 전 총리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진 글항아리]

일본에서 1999년에 나온 이 책은 제1부에서 메이지 초기 건군에서 다이쇼 말기까지, 제2부는 쇼와 육군, 3부는 종전 후에도 남아 있는 쇼와 육군의 그림자를 다룬다. 저술을 위해 500명을 인터뷰하고 방대한 자료를 섭렵했다. 저자는 일본의 3대 논픽션 저널리스트다. 『쇼와 육군』 등 쇼와 시대에 대한 150권에 달하는 그의 저작은 미국 학술 저서에도 인용된다. 저자는 이 책을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한글판 역자는 국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정선태 교수다.

저자는 쇼와 육군 엘리트의 무능을 여실히 드러낸다. 특히 사관학교 출신은 문사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공감능력이 없었다. 병사들은 그저 소모품이었다.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과 만행은 ‘애국’이었을 뿐이다. 그들 사생관의 핵심은 옥쇄(玉碎)였다. “부서져 옥이 된다는 뜻으로, 명예나 충절을 위하여 깨끗이 죽음을 이르는 말”이라고 우리 사전에 나와 있다.

저자는 특히 병사들의 체험과 시각을 중시한다. 병사들은 사실 전쟁의 희생자였다. 난징대학살(南京大屠殺, 1937~38) 등 병사들이 행한 점령지 만행은 그들이 장교들에게 받은 가혹행위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은 일본의 또 다른 ‘피해자 코스프레’ 유형으로 변질될 위험성이 있다. 그런 위험을 저지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전쟁 책임은 쇼와 천황에게 있다”는 게 저자의 기본 입장이다. 일본 우익이 망언을 내뱉으면 일본 매스컴은 저자로부터 멘트를 딴다. 일본 우익은 저자가 ‘자학(自虐) 사관’을 유포한다고 비난한다. 저자는 자신이 ‘자성(自省) 사관’을 추구할 뿐이라고 응수한다.

『쇼와 육군』이 우리 관점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쇼와 육군』의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책은 병력이 최대 600만 명 이상이었던 ‘쇼와 육군’이 왜 많은 착오를 범했는가를 해명하기 위해 쓰였다.” 착오? 우리나 중국 입장에서는 ‘범죄’나 ‘만행’이 더 적합하다. 일본의 생물전 실험에서만 20만 명의 중국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저자는 우리와 생각이 상당 부분 다르다.

저자는 태평양전쟁이 ‘동시대사에서 역사로’ 이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동시대사 국면에서는 역사는 정치적 책임을 묻고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하는 공간이다. 동시대사에서 “객관화된 사실의 인과관계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역사학의 영역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게 저자의 관점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할 일은 그러한 전환에 대비하며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일본인들의 과거사 인식을 파악하는 것이다.

[S BOX] 힘으론 강대국에 밀린 쇼와 군부, 정신력으로 승부

일본에 『쇼와 육군』이 있다면 미국에는 전쟁사가 에드워드 드레이가 쓴 『일본 제국 육군: 부상과 몰락, 1853~1945』가 있다. 그의 주장 중 일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은 물리적인 면에서 강대국들의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육군은 정신과 같은 무형의 수단을 중시했다. 일본군은 러일전쟁(1904) 이후 신들의 보호로 일본이 무적이라는 독트린을 만들었다. 히로히토(1901~89) 일왕은 사태의 전개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으나 군부의 결정에 대한 비토권은 없었다. 군부는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킬 의사가 있었으며 ‘모든 것’에는 일본 자체가 포함됐다. 일본 육군과 해군은 서로 정보 공유조차 안 할 정도로 심각한 갈등 관계에 놓여 있었다. 육군은 북쪽에서 소련, 해군은 남쪽에서 미국과 싸우는 것을 각기 선호했다. 일본 육군은 점령지를 1년에서 18개월 동안만 사수하면 미국이 협상에 임할 것이라고 오판했다.

김환영 논설위원 whan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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