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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사법권독립은 법관손에…|"외풍"없는 완전한 신분보장돼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사법권 독립은 법관들 스스로가 정립하고 과감하게 실천하는데서만 이뤄지는 것입니다. 법관의 손에 의해 사법권 독립이 확립될때 비로소 민주주의의 꽃이 활짝 피리라고 확신합니다』
지난해 12월 정년으로 법복을 벗은 이일규대법원판사의 퇴임사 마지막 부분이다. 이대법원판사는 별명이「대꼬챙이」로 사법부안에서 가장 존경받는 간부중의 한분이기에 이 말에 많은 후배법관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표정이었다.
사법권의 독립.
삼권분립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새삼 들먹이는 것조차 쑥스런 일이지만 특히 최근들어 우리나라에서는 사법권의 독립이 자주 거론된게 사실이다.
1891년 러시아 황태자가 일본을 유람중 한 일본경찰관의 습격을 받아 칼에 찔린 사건이 일어났다. 강대국인 러시아는 범인을 극형에 처할 것을 요구하며 일본정부에 으름장을 놓았다. 일본정부는 서슬퍼런 러시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일본황족 저격범에 적용하는 법으로 범인을 사형에 처하라고 대심원장 (우리나라 대법원장)에게 요구했다. 러시아의 선전포고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대심원은 그러나 관련 법조문을 엄격하게 해석하고『피해자가 일본 황족이 아닌 외국인이므로 사형에 처할 근거가 없다』며 단순한 살인미수죄를 적용, 무기를 선고했다. 일본정부가 발칵 뒤집힌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서구 여러나라에서는 이 판결을 보고「일본은 미개국이 아니다」고 판단, 스스로 불평등 조약을 고치도록해 일본의 국제적 지위가 크게 향상됐다.
결국 일본의 사법권독립은 이 황태자 피습사건으로 이룩됐다고 보고 있다.
『사회변화에 따라 최근에는 문제의 근원적 해결이 정치·경제적 정책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사법부의 분쟁해결권능으로는 치유가 불가능한 사건들도 그대로 법정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유태흥대법원장은 지난해12월 전국 법원장회의에서 오늘날 사법부의 어려움을 이렇게 말했었다.
최근들어 유행범처럼 번지고 있는 학생사건의 재판거부· 법정소란· 퇴정명령등의 악순환은 분명히 사법부의 분쟁해결권능의 차원을 넘어선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많은 법조인들은 사태가 이렇게 된것도 사법부 불신, 즉 사법권독립과 관계가 있다고 보고 있다.
6·25당시 서모대위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서민호의원 사건에서 당시 부산지법 양회경판사는 정당방위를 인정, 무죄를 선고했다. 서의원은 당시 야당소속으로 행정부 쪽에서는 유죄를 은근히 희망했던 것. 화가 난 이승만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김병노대법원장에게 항의하자 김대법원장은『불복하면 항소할 수 있다』는 간단한 답변으로 일축해 버렸다. 그후 양판사는 대법원판사로까지 승진했었다.
59년 경향신문 폐간의 계기가 된 칼럼「여적」난 사건으로 검찰이 집필자인 주요한씨와 한창우사장을 내란 선동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자 담당 송영규판사는『신분이 확실하고 증거인멸·도주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해버린 일도 있었었다.
그러나 사법권의 독립성이 의심스런 사례도 적지 않았다.
72년 서울고법 K판사는 공안사건의 주심을 맡아 합의과정에서 무죄의견을 제시했다가 유신헌법에 따른 법관재임명에서 탈락, 변호사가 됐다. 그 후 주요 공안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한 법관이 시골로 좌천되거나 법복을 벗는 것은 드물지 않게 됐다.
공정한 재판을 위해서 법관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인사압박으로부터의 해방, 즉 신분보장이다.
또 사법부로서는 예산의 독립, 외풍으로부터의 독립도 시급하다.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고등법원 부장판사) 은 매년가을 보다 많은 예산을 따내기 위해 행정부를 드나 들어야한다. 대법원장이 요청하는 예산을 경제기획원 예산 실무자들이 마구 깎아버리기 때문이다.
또 법관을 행정부에서 주관하는 사법시험을 통해 선발하는 것도 모순이어서 앞으로는 대법원에서 주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위헌심사권을 대법원이 되찾아오는 것도 시급한 과제다. 위헌심사권은 사법권의 본령이지만 72년 대법원의 국가배상법 위헌판결이후 헌법위원회가 이 권한을 앗아가 버렸다. 그 후 위헌심사는 단 한건도 이뤄진게 없었다.
사법부의 활성화는 곧 행정부에 대한 간접 견제를 의미한다.
윤노파피살사건·여대생 박상은양 피살사건에서 재판부가 수사과정에서의 가혹행위를 문제삼아 잇달아 무죄를 선고하자 한때 수사기관의 불법구금·고문행위가 크게 줄어들었던 것이 좋은 예다.
이제 곧 제5공화국 두번째의 새 사법부가 구성된다. 서울 서초동에는 88년 준공예정으로 법원 새 청사건설이 한창 진행중이다. 신임 김용철대법원장의 새 사법부가 산적한 당면과제 와 국민의 기대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기대가 크다. <김용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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