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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도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91호 29면

높고 깊은 산 속 암자에서 하안거를 끝낸 친구 스님이 찾아오셨다. 반가운 인사를 나눈 뒤 마침 점심때라 조용한 식당으로 모시고 갔다. 조그만 방에 자리를 잡자마자, 스님은 더위를 참을 수 없는지 윗저고리를 훌쩍 벗어부쳤다. 그 순간 스님의 허리춤에 뭔가 달랑달랑거렸다. 자세히 보니, 헉! 은빛 단검이었다.


“아니, 스님이 웬 단검을 차고 다니슈?” 놀란 내가 물었다. 스님은 단검을 쑥 뽑아 자기 가슴을 찌르는 시늉을 하며 대답했다. “하하, 목사님 놀라셨구려! 스스로 자신을 경계하자는 거죠. 겉모양은 수행자지만, 저도 나쁜 생각이 불끈거릴 때가 많거든요.”


“아, 그러면 그게 계도(戒刀)인 셈이군요.”


그날 나는 속세에 사는 내가 이런저런 꼬드김이 더 많으니, 계도야말로 내게 소용될 물건이라고 우겨 스님의 단검을 빼앗다시피 건네받았다. 그렇게 건네받은 계도를 나는 허리춤엔 못 차고 지금도 가방에 넣어 갖고 다닌다. 그날의 강렬한 인상 때문에, 종교는 다르지만. 나는 불가의 수행자들을 존경하는 맘으로 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불가의 수행자들도 모두 내 도반 같지는 않은 모양이다. 최근에 서양에서 온 눈 푸른 한 스님이 한국 불교를 죽비로 내리쳤다. 물론 애정 어린 죽비일 것이다. 조심스럽지만, 한국 불교도 많은 내적 모순을 품고 있나보다. 부처님의 종지(宗旨)보다는 돈에 눈먼 수행자가 많은 듯싶고, 진리의 길을 걷고 싶어 찾아오는 눈 푸른 수행자들에게 텃세도 없잖아 있는 듯싶고, 권력과 금력을 숭상하는 스님들의 가르침이 본령을 벗어나 기복신앙으로 치우지는 현상도 비일비재한 모양이다.


사실 남의 집안을 향해 이러쿵저러쿵 구시렁거릴 것도 없다. 내가 속한 집안도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보다는 번쩍이는 금화에 더 애면글면하고, 순수한 교우들의 기도와 땀으로 세워진 교회를 자식에게 대물림하고, 사사로운 이윤만 추구하는 악덕기업처럼 교회 재산을 사사로이 탐닉하는 성직자들의 비윤리적인 행태 따위는 일일이 열거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니까.


눈 푸른 수행자의 죽비소리가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까닭이다. 나라 사이의 경계도 희미해진 세상에서 내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기 위해 종파·교파·이념·국적 따위로 패거리를 짓는 행위는 종교의 대의에서 볼 때 얼마나 가소로운 짓인가. 그래서 중세의 수도승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은 하느님과 한 핏줄이자 한 씨”라고 갈파했다. 어떤 가문, 어떤 종족, 어떤 종파, 어떤 교파, 어떤 국적 같은 것보다 ‘하느님과 한 핏줄이자 한 씨’라는 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더 소중한 가치라는 것. 종교의 타락은 우리가 이런 존재의 대의를 상실했던 때에 비롯되지 않던가.


나 역시 세속에 살며 숱한 유혹에 끌려 갈근거릴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친구 스님이 나에게 건네준 칼을 가방에서 꺼내 그 시퍼런 날을 천천히 쓰다듬어 보곤 한다. 스스로 자신을 경계했다던 그 계도를!


고진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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