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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경영제 도입·생산배가 노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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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7차 소련 공산당 대회가 개막된 지난달 25일 크렘린의 대회의장. 정확히 4천 9백 93명의 대의원을 앞에 놓고 「고르바초프」 당 서기장은 『마치 15회전을 뛰는 헤비급 권투 선수처럼 피로와 쉰 목소리와 싸워가며』(뉴욕타임즈지) 5시간 30분에 걸쳐 2백 9페이지 짜리 연설문을 읽어 내려갔다.
내외정책의 기본노선을 장기적으로 전망하는 이 정책연설의 시작부분에서 그는 『70년대와 80년대 초의 게으름과 관료주의가 우리사회에 적지 않은 손실을 주었다』고 통박했다.
직접 이름을 지칭한 것은 아니지만 「브레즈네프」 시대와 그 세력들을 공격하는 내용이었다.
「브레즈네프」 시대 공격에 이어 「고르바초프」가 주안점을 두었던 것은 새로운 당 강령의 채택과 소련의 「21세기에 대한 도전」으로 일컬어진 2000년까지의 장기 경제개혁과 제12차 5개년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과 아울러 일반적 관심은 이번 당 대회에서 취임 1년이래 당·정부의 인사개편을 해온 「고르바초프」가 세력기반을 얼마나 더 굳힐 수 있는가에 쏠렸었다.
「흐루시초프」의 당 강령이 「환상적」이라는 이유로 새로 마련한 당 강령은 그러나 여전히 『자본주의는 멸망해 가고 있다』 『미국은 세계 제국주의의 센터』라는 등의 표현을 버리지 않아 종전과 별로 차이가 없다.
25일 당 대회 개막연설에서 「고르바초프」는 제11차 5개년 계획기간(1981∼1985년)중 공업·농업부문의 생산실적이 목표에 미달했음을 시인하고 금세기 말까지 생산성을 2배로 늘리고 국민소득도 2배로 늘릴 계획이라고 기본적인 윤곽을 제시했다.
이러한 지침에 따라 「리즈코프」 수상이 3일 당 대회에서 보고한 86∼90년까지의 제12차 신 5개년 계획의 중점은 생산의 효율화와 품질향상에 있음을 밝혔다.
『1986∼1990년 및 2000년까지의 소련 경제·사회발전의 기본방향』이란 이름의 이 보고 는 우선 2000년까지의 전략적 과제로서 국민소득의 연 성장률을 종래의 3·1%에서 5%로 늘리고 노동생산성은 2000년까지 2·5배 늘리는 것으로 잡았다. 앞으로 15년 동안 국민소득과, 공업생산을 2배로 늘리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기초로 한 90년까지의 12차 5개년 계획은 경제개혁의 역점을 기술혁신과 경제구조의 개편에 두겠다고 「리즈코프」는 밝혔다.
즉 투자의 기본방향을 과학기술 진보의 가속화에 두고 자동화 수준을 평균 2배로 늘리고 공업용 로보트를 5년간 3배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리즈코프」는 현재 소련 경제가 침체에 빠져있는 원인으로 『70년대부터 시작된 노동규율과 질서의 문란이 80년대 전반까지 계속돼 생산을 저해시켰다』는 점을 들었다.
이러한데서 오는 비능률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경제의 부분적인 분권화, 임금체계의 재조정, 지방 경제단위에 대한 자율성을 부여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소련 지도층은 서비스업과 소매업 부문에 부분적으로 민간경영제를 도입하고 87년부터 경제통제의 일부를 지방에 넘겨주는 새 규정이 87년부터 실시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서방 관측통들은 이러한 계획이나 구상이 이미 「브레즈네프」시대에도 실시됐던 실험조치의 연장에 불과한 것으로 그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고르바초프」가 정책연설에서 처음으로 소련에는 당장 「과격한 개혁」이 필요하다며 취임 1년만에 처음 개혁이란 용어를 사용, 강력한 의지를 보이기는 했으나 이러한 모든 계획이 『사회주의 원칙에서 후퇴하는 것은 아니다』고 강조, 핵심적인 중앙권한의 지방이양을 배제하고 있는 점을 그 이유로 지적하고 있다.
특히 이 계획을 어떻게 실현하겠다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는 점도 그 실현가능성에 의문을 갖게 하고있다.
6일 발표된 당 정치국·서기국 및 중앙위원회 구성을 보면 일단 「고르바초프」가 세력기반을 강화한 것은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고르바초프」는 아직 그가 늘 주장했던 것처럼 「부패와 관료주의에 물든」 구세력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1년간 정치국에서 「브레즈네프」시대의 인물들을 3명이나 몰아 내는데는 성공했으나 아직도 카자크스탄 공화국 제1서기인 「쿠나예프」와 우크라이나 공화국 제1서기 「시체르비츠키」가 완강히 버티고 있다.
「쿠나예프」의 경우는 당 기관 지프라우다를 통한 비판기사가 몇 차례 게재 됐는데도 불구하고 몰아내지 못한 점을 보면 아직도 「고르바초프」에 대한 저항세력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종래의 예와 비교해 보면 1년이라는 단시일 내에 「고르바초프」만큼 정부·당 조직을 개편, 장악한 예도 드물다.
6일 새로 정치국 정위원으로 임명된 「자이코프」를 포함, 「고르바초프」는 그 동안 5명을 새로 정치국에 맞아들였다. 「자이코프」의 정치국원 임명은 그가 군수문제와 관련된 중공업 담당서기였다는 데서 주목해야 될 것 같다.
지금까지 당 정치국에 산군연합체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 없었던 점을 생각하면 그의 정치국원 발탁이 후보위원을 거치지 않은 파격적 인사이긴 하지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KAL기 격추사건 이래 군부의 정치개입을 견제해 왔던 당 지도부가 군부·KGB 세력과 타협을 시도하는 조치로 풀이할 수 있다.
그가 또 모스크바와 전통적으로 경쟁관계에 있는 레닌그라드 당 제1서기 출신이란 데서 지역적 안배를 고려한 흔적도 보인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중앙위에서 새로 과학교육부장을 맡고 있던 「메드베데프」를 새로 서기에 임명한 사실이다.
첨단기술 개발·기술혁신 등 경제개혁을 목표로 하고 있는 「고르바초프」체제의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질적인 당 정책 의결기관인 당 중앙위 구성에서도 1백 4명의 새로운 얼굴이 등장해 「고르바초프」의 지도권을 강화해 주고 있다.
모두 3백 7명의 중앙위 위원 중 3분의 1이 넘는 인원이 새로 임명된 것이다. 「브레즈네프」시대에 10% 내외가 교체됐던 사실에 비하면 적어도 인사문제에서는 「고르바초프」는 「개혁의 이미지」를 심어주는데 성공한 셈이다.

<김동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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