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물범탕'에 '두뇌활성주사'…'수능 도핑'에 빠진 대치동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기사 이미지

지문을 통해 적성과 진로를 분석하는 지문적성검사. 입시철을 앞두고 강남지역에서 그 수요가 늘고 있다. 한 직업박람회에서 지문적성검사를 실시하는 모습.

"지문적성검사 결과를 보니 아드님에게는 전자공학과 보다는 의대가 적성에 더 맞습니다.”
“그런가요? 그런데 수능 점수가 조금 부족할 듯싶은데…가능할까요?”
“일단 두뇌활성주사를 잘 놓는 병원을 소개해드릴게요. 한의원에서 약도 처방 받으시고요.”

서울 대치동 학원 컨설턴트와 학부모 사이에 심심치 않게 오가는 대화다. 사교육 1번지 대치동에서는 요즘 ‘두뇌활성주사’ ‘지문적성검사’ ‘사주로 진학상담을 보는 한약방’ 등이 성업 중이다. 불과 2~3년만 해도 이 동네에서 아이 건강 좀 챙긴다는 엄마들 사이에서 물개즙(물범으로 만든 탕액)이 최고 인기 상품이었지만 지금은 보다 과학적(?)방법으로 진화한 셈이다.

‘두뇌활성주사’는 일종의 ‘칵테일 수액’으로 은행나무추출물인 진코발·비타민C·엘카르티닌 등을 섞어 만든 용액이다. 대략 40분 동안 몸 안에 주입하는데 가격은 1회당 8만원~12만원이다.

지난달 28일 대치동의 한 가정의학과를 찾아 “두뇌활성주사를 맞으러 왔다”고 하자 의사는 묻지도 않았는데 대뜸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모양"이라며 "요즘에는 수험생뿐 아니라 공시생도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이에 “시험이 다음 달인데 부작용은 없느냐”고 묻자 “잠이 안 오거나 어지럼증이 수반될 수 있으니 한 번 맞아보고 효과가 있으면 일주일 간격으로 맞으라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 의사는 “3일 연속 맞는 사람도 있다며 시험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기사 이미지

대치동 H건강원에서 물개즙을 만드는 모습. 한 솥을 끓이면 네 달치(240봉지)분량이 나온다고 한다. 김경록 기자

‘수능환’ ‘물범탕’ 등 수능보약에 대한 수요도 여전하다. 여러 종류의 한약재를 혼합해 만든 ‘수능환’은 100일 패키지가 100만원을 넘을 만큼 비싼 가격에도 기억력과 집중력을 높여준다는 소문에 많은 학부모들이 찾고 있다. ‘물범탕’도 암암리에 거래중이다. 캐나다의 하프물범을 미꾸라지·철갑상어 등과 함께 달여 만든다는 물범탕은 60포에 50만원을 웃도는 가격이지만 없어서 못 팔정도라는 게 업자 얘기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러한 ‘수능도핑’에 의문을 제기한다. 동국대 가정의학과 오상우 교수는 두뇌활성주사에 대해 “의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 아니다”면서 “신체성장이 완벽하지 않은 청소년들에게 이런 주사를 주입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립암센터 명승권 교수는 “수능환 등 수능보약들은 대부분 임상실험을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며 “부작용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기사 이미지

지문 스캐너를 통해 지문을 등록하는 모습.

그렇다면 지문분석이나 사주풀이를 통한 진로상담은 어떨까. 지문적성검사는 손가락 지문을 분석해 해당 학생에게 어울리는 전공과 공부방법 등을 설명해준다.

방배동에 위치한 한 지문검사센터 관계자는 “1600년대부터 연구가 시작된 지문학의 일종”이라며 “심리학과 통계학을 활용해 지문을 분석함으로써 지능·성격·학업·진로 등을 분석하는 과학적인 연구”라고 설명했다. 비용은 회당 10만원. 검사는 약 40분 간 진행되며 2주 후 분석보고서와 함께 상담을 받을 수 있다.

기자가 지문적성검사를 의뢰하자 관계자는 “지문검사는 수험생 뿐 아니라 직장인들에게도 효과적”이라며 “지금 다니는 직장이 본인의 적성에 맞는지, 이직을 생각하고 있다면 어디가 좋은지 분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치동의 한 한약방에서는 한약제조와 함께 ‘사주풀이를 통한 진로상담’을 하고 있었다. 해당 한약방은 “사주를 분석하면 학생에게 어울리는 전공과 대학을 알 수 있다”면서 “사주에 나와 있는 기운을 분석해 한약을 함께 복용하면 집중력과 실력이 향상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일선 교사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세화여고 문우일 교사는 “교육자 입장에서 사주풀이 등으로 진학상담을 한다는 건 뻔한 상술”이라며 “플라시보효과 이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적성이란 학생 스스로 학습하고 체험하면서 발견해 나가는 것이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검증되지 않은 방법으로 정말 중요한 인생의 선택을 그르칠 수도 있다"면서 “그럼에도 적성검사를 통한 조언을 받고 싶다면 서울진로장학정보센터나 커리어넷 등을 통해 무료로 검사를 받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민관 기자kim.minkwa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