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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신분제로 가는 우리 사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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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0호 29면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파면이 지난 22일 대통령의 ‘파면 인사발령’을 통해 확정됐다. 한편으로 처연한 생각이 든다. 나씨가 이달 7일 기자들과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한 문제발언의 첫 마디는 “나는 신분제를 공고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였다. 경향신문의 첫 보도기사를 보면, 황당하다고 여긴 기자는 “신분제를 공고화시켜야 한다고?”라고 되물었고, 별도로 괄호 안에 ‘모두 농담이라고 생각해 웃음’이라는 설명까지 달았다.


만일 나씨가 자신을 파멸로 이끈 발언 대신 “우리 사회에 신분제가 되살아나고 있다는 느낌”이라든가 “사실상의 신분제가 점차 공고화되는 조짐이 보인다”고 말을 꺼낸 뒤 그 진단의 적실성 여부와 향후 대응에 대해 기자들과 한바탕 토론이라도 벌였다면 어땠을까. 그의 발언에 전 국민이 분노한 것은 인식 자체의 문제와 교육부 고위직이라는 직책과 인식 사이의 엄청난 괴리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는 많은 사람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감지하고 있던 우리 사회의 아픈 ‘급소’를 개·돼지라는 거친 비유를 인용해가며 찔렀기 때문에 더욱 펄펄 끓는 반응을 불렀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신분제가 되살아나고 있다는 느낌’이라는 정도의 문제의식은 요새 유행하는 금수저·흙수저론을 굳이 들추지 않더라도 적지 않은 이들이 갖고 있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는 지난달 24~25일 대구광역시 교육연수원에서 열린 한국교육학회 연차학술대회에서 ‘대학교육의 현실과 교육학의 과제; 실력주의 사회에 대한 신화 해체’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동안 정부와 사회가 학벌 타파를 통한 능력(실력)중심사회 구현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목표가 달성되기는커녕 부모의 배경이 더욱 중요하게 작용하는 사회, 즉 세습사회적 특성이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학벌 타파를 통한 실력주의 사회 구현을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신(新)세습사회를 구축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50대 중후반 기성세대가 고교생이던 1970년대만 해도 『성문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 좀더 욕심을 부려 『영문해석 1200제』와 『경향과 대책』까지만 들여다 보면 아무리 시골이라도 서울의 괜찮다는 대학에 무난히 진학할 수 있었다. 실력주의(meritocracy) 사회는 세습된 신분이나 부(富)가 아닌 개인의 실력에 의해 권력과 재화가 분배되는 사회를 말한다. 과거의 한국 사회는 상대적으로 세계 어느 나라 못지 않게 실력주의가 통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어느 때부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실력주의가 사회 구성원 대다수의 동의를 얻는 배경에는 두 가지 가정이 깔려 있다. 실력 형성은 개인의 노력에 달려 있고 결과 또한 개인 탓이라는 개인책임론, 그리고 타고난 능력에는 큰 차이가 없고 있더라도 노력으로 극복이 가능하다는 노력무한가능론이다. 두 가정 모두 상세히 파고들면 근거가 탄탄하지 못한데다, 부모·가정의 배경이나 사교육 같은 ‘비(非)실력적 요인’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진 결과 대한민국은 실력주의의 역기능이 순기능을 압도하는 나라로 변하고 있다고 박 교수는 파악한다. 최근 들어 교육이 점차 세습되는 양상을 보이는 데 대해서도 그는 ‘실력’의 의미를 규정할 권한과 통제력을 가진 사회 상층부의 의도적 작용과 함께 그동안 실력주의 사회가 지속되면서 ‘타고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점차 사회 상층으로 몰린 결과로 파악한다. 과거와 달리 개천에서 용이 별로 나지 않는 것은 ‘개천에 새끼를 낳는 용이 점점 줄어가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필자도 어쩔 수 없는 ‘아재’이자 기성세대여서 젊은이들이 ‘노오력’ 어쩌고 하며 사회 탓과 자조를 일삼는 듯한 모습을 보면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든다. 그러나 40, 50년 전과 환경과 구조 자체가 달라졌다는 점만은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한 여론조사를 보면 자녀가 자신보다 더 잘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이 50, 60대는 절반 가량인 반면 20, 30대는 불과 5명 중 1명꼴이었다. 20, 30대가 성공의 조건으로 꼽는 것은 ‘열정과 노력’이 아니라 ‘돈과 인맥’(76%)이었다(7월19일자 서울신문). 그나마 교육이 계층상승에 기여하는 비중도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다. 해방 후 고난 속에서도 용광로처럼 열기와 활력이 넘치던 우리 사회가 어느덧 70년이 지나면서 물은 물대로 앙금은 앙금대로 층층이 나뉘는 모양새다. 무언가 불길하지 않은가. 젊은 세대가 희망을 접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 다수의 동의를 받지 못하는 실력주의는 권력과 재화의 분배 기준으로서 쓸모가 다한 거나 마찬가지다. 치열하고 오랜 논쟁이 필요하겠지만, ‘신(新)신분제’를 타파할 새로운 기준을 모색할 시점인 것 같다.


노재현중앙일보플러스?단행본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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