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마닐라외교가 미 조치·반응에 관심집중|홍성호 특파원이 본 필리핀 개표 현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이곳 국민들뿐만 아니라 외국특파원·필리핀 거주 외국인 모두가 앞으로의 사태에 대해 오리무중이라는 의견.
10일과 11일 열린 국민의회에서도 1천 여명의 방청객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밀려들어 회의진행을 지켜보았다. 국민의회는 이들과 외국보도진을 의식, 3번씩이나 정회를 거듭하면서 끼리끼리 모여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교환한 후 당초의「국회집계」방침을 번복했다.
개표 4일째인 11일 국민의회가 선관위와 자유선거국민운동의 집계를 중단시켰다가「마르코스」의 번복 지시와 의회 내 의견대립으로 국민의회가 다시 이 두 기관으로부터 개표집계내용을 기다리기로 했다고 발표하자 시민들은『시간을 끌어 또 다른 수법을 쓰려는 것이 아니냐』고 의문을 표시.
그 동안 필리핀 선거에 대해 부정선거라는 비난으로 일관해 오던 미국이 11일「레이건」대통령의 발언을 계기로「마르코스」정부를 지지하려는 뜻을 비치자「마르코스」대통령도 이에 맞장구. 「코라손」여사에 대한 승리감이 어느 때보다도 강해 보이는「마르코스」대통령은 11일『야당에 어떠한 보복도 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필리핀 유권자들이 나의 친미 정책을 지지한다는 것을 이번 선거를 통해 알았다』고 밝혔다.
그는 또『아시아에서 전쟁을 막기 위해 미국의 군사기지는 꼭 필요한 것이며 그런 뜻에서 나의 당선을 지지해준 필리핀국민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코라손」여사는 11일 전세계에「마르코스」를 지지하지 말라는 성명을 발표.
「코라손」여사는 외신기자들을 통해 발표한 이 성명에서『우리는 승리했으며 곧 정권을 인수할 것』이라고 말하고 『전세계 모든 민주우방과 자유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근시안적인 자기 이익을 위해 이미 패배한 민중의적, 독재자「마르코스」를 지원하는 과오를 저지르지 말라』고 촉구했다.
그녀의 보좌관들도 이미「코라손」여사를「대통령당선자」라고 부르고있다.
마닐라 외교가의 관심은 미국의 조치와 반응.
사업가이자「코라손」지지자인「르메르」(55)씨는『이번 필리핀선거를 앞두고 미국정부·국회·언론계가 일치되어「마르코스」를 공격한 점으로 미루어 중대조치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이들이 예상하는 중대조치는「마르코스」대통령에 대한 자진사퇴 종용. 「마르코스」가 미국측 제의를 거부할 경우 이번 선거의 결과를 미국이 인정하지 않고 미군이 진주할 수도 있다는 것.
한편 한 학생은 이 이야기에 얼굴을 붉히며『필리핀이 미국의 영향권 아래 있다는 나약한 생각』이라고 말하고『우리 힘으로 얻을 때 진정한 민주주의가 올 것』이라고 다짐.
3천명 가량의 데모대가 미국이 필리핀 대통령선거를「마르코스」장기집권정당화에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11일 마닐라시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서 2명의 가수가 이번 선거는『「레이건」이 이미 요리해놓은 음식』이라고 풍자한 노래를 불렀다. 「바얀」(민중)이라고 부르는 투쟁조직에 속하는 시위대를 이끌고 있는 학생지도자「에프렌·튤라」씨는『우리 국민은 독재자가 이미 선거를 하기도 전부터 승리를 얻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마르코스」대통령은 11일 미국이 이번 선거결과를 부정한다면 필리핀내의 미군기지는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며 중공 등의 새로운 동맹국에 넘겨 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날 성명을 통해 이같이 말하고『미국이 우리를 원하지 않는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 중공 등 다른 나라와 잠정협정을 맺는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미 의회 감시단이「마르코스」를 호되게 비판하는 등「마르코스」가 완전히 궁지에 몰리자 일부 각료들까지도 필리핀을 탈출할 준비를 하고 있다.
「엔릴레」국방상은 10일 손자들을 포함한 전 가족의 여권을 서둘러 발급 받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한편 11일에는 야당고위지도자 한 명이 M-16을 든 복면 괴한 6명의 습격을 받고 목욕탕에 숨었으나 무차별 사격을 받고 사망.
이날 사망한「에벨리오·하비에르」씨(43)는 안티케 주지사로 산호세에 있는 주 청사 앞에서 총격을 받고 한 가게로 뛰어들어 목욕탕에 숨었으나 자동소총 세례를 받고 현장에서 즉사했다.
또 마닐라 남부 루세나의 야당 민주연합(UNIDO)부회장인「마이클·수멀랑」씨(29)는 10일 4명의 괴한으로부터 습격을 받고 숨졌다.
필리핀 관영 PNA통신은「수멀랑」씨가 루세나시의 개표결과를 복사한 서류를 운반하는 지프 앞에 서 있다가 피격됐다고 주장했다.
「하이메·신」추기경은「마르코스」대통령이 이번 선거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엄청난 부정행위들을 고발하고 있는 시민감시기구를 계속 공격한다면「마르코스」를 거짓말장이로 선언하겠다고 11일 개인적으로 경고했다.
필리핀 국민들은 대부분『「코라손」이 투표에서는 압도적으로 이겼으면서도 표 도둑을 당하고 있다』고 말하고『어쨌든「마르코스」가 개표에서 이길 것은 뻔한 일』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하지만 지식층은『이번만은 지금까지의 역사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외국기자들을 만날 때마다『당신들이 우리를 도와주고 있다』고 감사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