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영란법’ 시행 두 달 전, 긴장하는 정·관·재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금지에 관한 법률) 시행을 두 달 여 앞두고 5대 그룹 대외협력 담당 임원인 A씨는 걱정이 많다. 법 시행 이후 대외협력 업무 추진방안을 아무리 검토해도 ‘노(No) 답’이기 때문이다. A씨 업무는 정·관계 인사를 만나 현안에 대한 회사 입장을 설명하고, 동향을 파악하는 일이다. 점심, 저녁 가릴 것 없이 주로 식사와 술자리에서 관련 인사들을 만난다. 주말에는 주로 골프를 친다. 모두 관계를 좋게(?) 하기 위해서다.

‘버거 보이’, ‘영란언니 앱’, ‘란파라치’ 등 신용어 등장
시행 땐 각자 지불하는 더치페이 문화 확산될 듯

그런데 ‘김영란법’이 시행돼 식사와 선물 가액이 각각 3만원, 5만원으로 제한되면 간단한 식사나 차 한잔 정도만 대접할 수 있다. 주말 접대골프는 엄두도 낼 수 없다. A씨는 “내부 검토 결과 식사도, 선물도, 골프도 안 되고, 사실상 할 수 있는 게 없다. 시행 초 시범 케이스로 걸리면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회사와 접대받는 상대방까지 큰 망신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납작 엎드려 있는 게 상책”이라고 말했다.

‘김영란법’의 적용대상은 공직자(선출직 공무원 포함), 사립학교 교직원, 언론인 등이다. 권익위는 최대 400만명이 이 법의 적용 대상이라고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대상자들을 상대하는 일반 국민(부정청탁과 금품제공 일반인에도 과태료 부과)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래서 ‘김영란법’의 파장은 어마어마하고 새로운 ‘국민생활수칙’이 나왔다고 할 정도다. 파장이 워낙 크다보니 법 적용을 피할 수 있는 온갖 아이디어와 자조섞인 농담까지 나오고 있다.

│‘버거보이’ 등장 가능성
최근 대학 동기 저녁모임에 참석한 IT 관련 대기업 임원 B씨는 동석한 공무원, 국회의원 보좌관, 언론인 친구들에게 멀찍이 떨어져서 따로 먹으라는 농담을 건넸다. 자신이 밥값을 낼 차롄데 회정식 가격은 1인당 3만원이 넘으니 ‘김영란법’ 대상자들은 맥도날드 햄버거를 주문해서 따로 먹으라는 말도 곁들였다. 10년을 훌쩍 넘긴 오랜 친구사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업무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B씨는 회사 안에 전문 ‘버거 보이’가 생길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도 했다. 1인당 식비를 전체 식비에서 참석자 수로 나눠 계산하기 때문에 1인당 3만원이 넘는 식당에서 접대를 하려면 참석자 수를 늘리는 것이 필요하다. 값싼 햄버거를 먹는 후배 직원 몇 명을 데리고 갈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럴 바엔 전문 아르바이트팀을 운영하는 게 낫겠다는 얘기도 오갔다.

│‘2만9000원 짜리 맛집’ 앱 나올 듯
IT 업계에선 네비게이션 앱인 ‘김기사 앱’을 빗대 내 주변 1인당 2만9000원짜리 맛집만 콕 찍어서 검색해주는 가칭 ‘영란언니 앱’이 조만간 나오는 것 아니냐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IT 대기업 홍보부장 C씨는 “연간 합계 300만원 이상 금품을 제공하면 형사처벌되기 때문에 특정인을 지정해 놓으면 식사, 선물, 경조사비 지급총액을 알아서 계산해주고 300만원을 넘을 것 같으면 자동 경고해주는 앱도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포상금 노린 ‘란파라치’ 활개칠 수도
취업난 속에 밤 10시 이후 학원 수업금지 위반을 신고하는 ‘학파라치’에 이어 부정청탁이나 금품수수 위반을 전문적으로 신고하는 ‘란파라치’나 ‘영파라치’(김영란 전 권익위원장의 이름에서 따옴)도 등장할 분위기다. 권익위가 법 시행과 함께 포상금 제도도 도입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국민권익위원회 박형준 홍보담당관은 “법이 시행되면 신고가 몰릴 것으로 보인다”며 “음해나 무고가 늘어날 수 있어 신고할 때는 반드시 증거자료를 제출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골프접대 사라지고 '치맥' 인기
최근 전국 골프장에는 연일 최고기온을 경신하는 불볕 더위 속에서도 ‘부킹(예약)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법이 시행 후에는 보통 1인당 30만원 정도 되는 골프비용을 대신 내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법 시행 이후 골프 접대가 상당히 줄어들 것이라고 보고 있다. 실제 상당수 업체는 9월 28일 이후에는 아예 골프 약속을 잡지 않고 있다고 한다. 고급 식당 접대문화가 점차 사라질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한 중앙부처 4급 공무원은 “법 시행 이후 1인당 3만원이 넘는 음식집에 갈 간 큰 공무원은 한 명도 없을 것”이라며 “식당에 가면 혹시나 싶어 무조건 메뉴부터 확인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홍보업체 대표는 “저녁식사 장소로 한정식집이나 고깃집 대신 3만원 내에서 식사와 술을 충분히 먹을 수 있는 호프집 ‘치맥(치킨+맥주)’이 상한가를 칠 것 같다. 깔끔한 인테리어를 갖춘 고급 호프집이 많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① 김영란법 시행 앞둔 인사동 "한정식집 등 매물 30개"
② 헌법재판소, '김영란법' 위헌 여부 28일 선고



│‘더치페이’ 문화 확산
더치 페이 문화도 확산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나오고 있다. 10대 그룹 홍보담당 한 임원은 “ 내부 검토 결과 편법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겠지만 3만원까지는 접대하고 나머지는 각자 내는 더치 페이 쪽으로 가는 게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말했다. 정치컨설팅업체 아젠다센터 이상일 대표는 “헌법재판소 위헌 결정을 앞두고 있지만 여론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해 정치권은 법 개정에 엄두를 못 낼 것”이라며 “시행 전 마지막 명절인 9월 중순 추석을 마지막으로 여의도와 광화문의 밤문화가 많이 바뀌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차세현 기자 cha.sehyeo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