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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월요일] 미디엄? 웰던?…이렇게 주문 받는 게 수제버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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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는 현대 식품혁명의 총아다. 지금은 ‘인스턴트’ ‘패스트푸드’ 같은 말이 시대에 뒤떨어진, 몸에 이롭지 않은 것들을 총칭하는 분류로 들릴지 몰라도 반세기 전 그것은 해방의 언어였다.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풍요의 시대가 왔을 때 사람들에게 절실한 건 ‘시간’이었다. 빠르게 영양을 섭취하고 남는 시간을 노동에 효율적으로 쓰는 게 급선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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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의 ‘빅맥’.

맥도날드 버거는 이즈음 ‘해방의 기수’로 등장했다. 헨리 포드가 자동차 제조 속도를 끌어올릴 때 썼던 조립라인 기술이 식당에도 도입됐다. 효율적인 주방 설계는 초고속 버거 제조를 가능케 했다. 1954년 시카고 토박이 사업가 레이 크록은 딕과 마크 맥도널드 형제의 레스토랑 프랜차이즈 영업권을 인수했다. 매장이 전 세계 3만5000개가 넘는 데다 대표 메뉴인 ‘빅맥’의 가격이 각국 물가 측정의 주요 지표가 되는 거대 공룡 기업의 출발이었다.

미리 조리해둔 프랜차이즈 햄버거
‘초고속 서비스’열었지만 입맛 획일화
쇠고기 등 재료 품질 높이고 풍미 살려
접시에 내놓는 1만원 넘는 버거 속속 등장
요즘 고객들‘버거 이상의 버거’원해
새로 문 연‘쉑쉑버거’2~3시간 줄서기도

그러나 소설가 장정일이 “맛이 좋고 영양 많은 미국식 간식”(시집 『햄버거에 관한 명상』, 민음사, 1987)이라며 햄버거를 예찬했던 시대는 갔다. 미국 다큐멘터리 감독 모건 스퍼록이 제작한 ‘수퍼사이즈 미’(2004)는 맥도날드류의 패스트푸드 남용과 비만 사회의 길항관계를 고발한다. 더 빠르게 더 많은 이에게 영양을 공급하려던 목표는 품질과 입맛의 획일화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그 틈새를 언제부턴가 ‘수제(手製)버거’라는 신조어가 파고들기 시작했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장정일은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수제버거란 게 어디 있어요. 버거는 다 손으로 만들지. 괜히 수제버거라고 하면서 값 올리고 다른 햄버거에 몹쓸 이미지만 덧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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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서울 강남대로에 문을 연 쉑쉑버거 강남점 앞에서 고객들이 개점을 기다리며 길게 줄지어 서 있다. [뉴시스]

그러나 ‘버거 이상의 버거’를 열망하는 이들이 더 많은가 보다. 지난 22일 서울 신논현역 인근 강남대로 길가 1층에 문 연 ‘쉐이크쉑(Shake Shack·일명 쉑쉑) 버거’ 한국 1호 매장 앞. 개장 시간은 오전 11시였지만 새벽부터 끝 모를 줄이 늘어섰다. 섭씨 30도가 넘는 땡볕 아래 최소 2~3시간을 기다려 주문에 성공한 이들은 ‘인증샷(결과물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이를 과시했다.

사진 중심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인스타그램에는 ‘#쉑쉑버거’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이 24일 현재 4만 개에 육박한다. 지난해 8월 현대백화점 판교점 개점 당시 ‘매그놀리아 컵케이크’ 광풍을 뛰어넘어 아이폰 신제품 출시 때와 비견되는 신드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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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이크쉑 버거의 대표 메뉴인 쉑버거. 토마토와 양상추에 쉑 소스가 토핑된 치즈버거다. [사진 김경록 기자], [중앙포토]

2004년 미국 뉴욕 메디슨 스퀘어에 1호점을 연 쉑쉑버거는 ‘Stand for Something Good’을 지향한다. ‘좋은 음식을 먹기 위해 줄 서서 기다린다’와 ‘좋은 것을 지지하다’를 모두 의미한다. 일단 줄 서서 기다려야 하는 것은 맞다. 서울뿐 아니라 뉴욕·도쿄 등 웬만한 매장에선 줄 서는 것을 개의치 않는 손님들이 기꺼이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 여기에 쉑쉑 측은 항생제와 호르몬을 사용하지 않는 쇠고기, 차별화된 인테리어 등을 강조한다. 줄을 서서 소비할 가치가 있는 건 음식만이 아니라 이들의 철학이기도 하다는 의미다.

그런데 프랜차이즈 버거집에서도 혼잡 시간에 줄 서는 건 매한가지 아닌가. 나아가 장정일의 지적대로 버거는 다 손으로 작업한다. 맥도날드·버거킹·롯데리아 같은 프랜차이즈에서도 숙련된 주방 직원들이 패티(육고기를 다져 만든 소)를 굽고 빵, 양상추, 양파, 토마토 등 재료를 한데 합쳐 포장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수제버거’는 고급·프리미엄에 소박한 색채를 씌우려는 과잉 수사 아닐까.

“솔직히 수제버거란 ‘형용모순’이라고 생각해요. 대량생산된 공산품의 대척점에서 수제화·수공예품 같은 핸드메이드를 강조하는 것인데, 버거는 모든 공정을 기계로 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력이 발전하지 않았거든요.”

이 말의 주인공은 국내에서 가장 성공한 수제버거집으로 알려진 ‘브루클린더버거조인트’(이하 ‘브루클린’)의 박현(36) 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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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버거집 브루클린더버거조인트의 치즈버거(위). 패티의 굽기를 조절해주고, 종이 포장지가 아닌 사기 접시에 담겨 나온다. [사진 김경록 기자], [중앙포토]

2011년 서울 서래마을에 문을 연 ‘브루클린’은 이름 그대로 뉴욕 정취를 풍기는 소규모 버거집으로 입소문을 탔다. 박 대표가 미국 전역의 버거 레스토랑을 100곳 넘게 다니며 벤치마킹한 고품질 버거가 한국의 젊은 입맛을 사로잡았다. 프랜차이즈 햄버거가 ‘정크 푸드’ 논란에 발목 잡히고, 국내에서 ‘웰빙 음식’에 대한 수요가 확산되기 시작한 때다. 대표 메뉴인 ‘브루클린 웍스’는 패티 140g을 선택할 때 9800원, 200g짜리는 1만1800원이나 한다. 그럼에도 신사동 가로수길과 압구정 갤러리아백화점 등에 입점하면서 총 5개 매장으로 확산 중이다.

수제버거라는 말을 마다할 뿐 ‘브루클린’은 프랜차이즈 버거와 차이점까지 거부하진 않는다. 버거 개발에 공동 참여한 조휘성(34) 실장에 따르면 가장 큰 차이는 프리쿡(pre-cook) 여부다. 회전율이 높은 대형 버거 체인점에선 상당 재료를 미리 만들어서 조립만 하거나 피크 타임 땐 조립·포장까지 해둔 상태로 판매한다.

브루클린 버거의 차이는? 일단 풍미다. 직전에 강한 화력과 만나 마이야르 반응을 일으킨 갈색 패티가 구수하게 코를 자극한다. 고객의 취향에 맞춰 패티의 굽기 정도를 조절해 준다. 테이크아웃을 전제로 하는 종이 포장지가 아니라 1960년대 미국 간이식당에서 만날 법한 클래식한 사기 접시에 담겨 나온다. 일반 레스토랑처럼 포크·나이프도 갖춰져 있다. 메뉴 하나하나에 개발자의 창조성과 위트가 번득인다. 즉 이곳에서 먹는 버거는 여느 다이닝 레스토랑처럼 격조 있는 한 끼이자 ‘슬로푸드’다. “버거의 패스트푸드 이미지를 씻는 것, 그게 차별화 포인트였다”(박현 대표)는 설명이다.

‘브루클린’은 애초 프랜차이즈 버거를 경쟁상대로 놓지 않았다. “강남에는 한 끼 1만원 이상을 지불할 수 있는 수요층이 충분하다. 쫓기듯 때우는 게 아니라 버거 자체를 음미하면서 적합한 음료와 맥주를 즐기려는 이들이 호응했다”고 박 대표는 말한다. 쉑쉑 역시 마찬가지다. 일반 버거집과 달리 와인에다 루트비어(알코올이 거의 없는 맥주)까지 갖춰 취향대로 즐길 수 있게 했다. 애견인을 위해 개밥 메뉴도 판매한다. 쉑쉑 스스로는 버거 시장에서 ‘파인 캐주얼’을 개척했다고 강조한다. ‘파인 다이닝’에 기초한 맛과 품질, 차별화된 문화를 소비하는 곳이라는 의미다.

국내 외식업계는 차별화를 통한 패스트푸드 블루오션 경쟁이 시작됐다고 본다. 한쪽에선 ‘봉구스밥버거’ ‘맘스터치’ 같은 저가 브랜드가 박리다매 전략으로 돌풍이다. ‘오케이버거’ ‘버거비’ 등은 레스토랑형 고가·고품질로 승부하고 있다. 쉑쉑의 가장 싼 버거가 6900원인 것을 놓고 일각에선 ‘허세버거’라고 비웃지만 분명한 건 더 많은 선택지가 열렸다는 사실이다. “음식 값으로 쓰는 한 푼 한 푼은 투표할 때의 한 표와 같다”고 저널리스트 에릭 슐로서는 말했다. 어떤 ‘버거 문화’에 투표할지는 당신 몫이다.

음식상식 독일 지명 함부르크에서 유래한 햄버거, 미국 국민음식으로

햄버거(hamburger)의 기원에 대해선 다양한 설이 있지만 독일 지명인 함부르크(Hamburg)에서 유래됐다는 게 일반적이다. 19세기 초반 미국으로 이민 온 독일인들이 선보인 갈아서 양념한 쇠고기 요리가 ‘햄버거 스테이크’라는 이름으로 처음 소개됐다. 구운 빵 사이에 패티를 넣은 지금의 모습이 갖춰진 건 1880년 전후로 추정된다.

글=강혜란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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