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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델리서 서울까지 35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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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아시아인의 「영원한 전진」을 표방하고 출범한 아시안게임은 발상지 뉴델리에서 서울에 이르는 35년 동안 그 슬로건에 걸맞지 않은 숱한 시련과 격랑을 헤쳐왔다.
지난 48년 런던올림픽에 참가한 아시아 13개국 대표들은 인도의 「손디」 IOC위원의 제창에 따라 종전의 극동선수권대회와 서부아시아경기대회를 통합한 아시안게임을 창설키로 의결, 이듬해 2월 정식으로 AGF (아시아경기연맹)를 결성했다.
1회 대회는 51년3월 인도의 뉴델리. 14개 회원국 중 11개국에서 6백명의 선수가 출전, 6개 종목을 겨룬 결과 일본이 금메달 20개로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은 6·25동란 중 참가한 헬싱키올림픽 AGF총회에서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 54년 제2회 마닐라 아시안게임에 첫 출전하여 일본·필리핀에 이어 종합 3위를 차지했다.
제3회 동경대회까지 순탄한 길을 걸어온 아시안게임은 62년 자카르타 대회에서 첫 파란을 겪었다. 주최국 인도네시아가 정치적인 이유로 이스라엘과 자유중국의 초청을 거부, 국제 스포츠계의 비판대에 올랐다.
인도네시아는 대회 불법화를 고짐하던 AGF 「손디」부의장을 추방하는 등 주최국으로서의 횡포를 부리며 IOC와 정면으로 대립, 결국 말썽 많은 신생국 경기대회(GANEFO)를 탄생시켰다.
제5회 방콕대회 (66년) 에서 한국은 첫 종합 2위를 달성하며 6회 대회 개최권을 따냈다. 그러나 한국은 국내사정으로 2년만에 개최권을 반납, 체면 손상은 물론 아시안게임 유산의 위기를 초래했다.
결국 방콕이 6회 대회를 다시 개최하는 조건으로 대회적자 40만달러를 회원국이 부담키로 결정, 한국은 이중 25만달러를 지불했다.
74년 제7회 테헤란대회는 아시안게임의 변모를 가져왔다. 8억 인구의 대륙 중공이 아시아 무대에 처음 등장함과 동시에 자유중국은 AGF에서 축출되었다. 아울러 북한이 처음 출전함으로써 아시안게임은 숨막히는 남북대결의 전장으로 바뀌었다.
또 중공·북한의 등장과 함께 산유국의 부를 등에 업은 아랍권 국가의 득세로 아시안게임은 새로운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78년 제8회 아시안게임은 싱가포르·파키스탄으로 개최권이 맴돌다 결국 세 번째로 방콕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서 AGF는 중공·북한·아랍권국가가 주동이 된 아시아스포츠최고회의를 정식 승인, 이들 국가의 주도로 넘어가고 말았다.
출범 32년만에 발상지 뉴델리로 돌아온 제9회 아시안게임은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란 새로운 이름으로 새 출발했다. 아랍권의 입김에 시달리던 이스라엘이 OCA에서 축출된 것도 불가피한 일이다.
이 대회에서 중공은 일본의 독주를 따돌리고 처음으로 종합우승, 스포츠 강국으로서의 발판을 굳혔다.
현재의 OCA위원장은 쿠웨이트의 「쉐이크·파히드」, 회원국은 33개국, 헌장 경기종목은 28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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