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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군 사관 강영자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저희들의 제복이 일제시대의 순경이나 북한 인민군의 옷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며 거부감을 나타내는 분들이 아직도 계시더군요. 그렇지만 세계 80여개국의 구세군이 모두 같은 옷을 입도록 되어 있으니 그점을 이해해 주시면 좋겠어요』
해마다 12월에 접어들면「이웃돕는 마음」을 일깨우는 사랑의 종을 흔들며 추운겨울 거리에 빨간 자선남비를 내걸어온 구세군사관 강영자씨(53).
구세군사관들을 간첩으로 알고 경찰에 신고하기까지했던 시절에 비하면 이제 구세군에 대한 인식이 매우 높아 졌지만 그본래정신과 평소활동에 대해서는 아직도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고 아쉬워한다.
강씨는 6·25동란직후 구세군이 경영하는 후생학원(고아원)에서 교사로 일한것이 구세군가정을 이루게된 계기가 됐다.
당시 동료교사이던 지금의 남편과 결혼한 뒤 부부가 나란히 구세군사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지난 63년.
65년에 졸업한이래 부위란 계급으로 시작해서만 20년째 구세군으로 활동하고 있는 강씨부부는 현재 삼령이다.
그동안 강씨는 복음선교와 예배등의 교회활동보다 지역사회봉사및 사회사업활동에 치중해 왔다.
요즘은 구세군대한 본영여성사업부에서 연말의 자선남비모금외에도 1년내 자선바자를 열거나 신자들의 행복한 가정만들기및 친교프로그램개발등의 일을 맡고있다.
『구세군이란 산업혁명 당시 영국의 귀족화한 교회로는 죄악과 싸우거나 빈민구제활동을 펴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부드」목사부부(감리교파)가 군대제도를 모방하여 창시한 총교』라고 설명하는 강씨.
그는 이사회의 불행한 어린이를 「내자식 처럼」돌보는데 행여 지장이 있을까봐 자신의 자녀를 낳지않고 부부구세군으로서의 삶에만 충실하려 애쓴다.
두사람의 월급은 각각 19만원.
자선남비를 내걸고 보면 대체로 중산층이하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누는 즐거움과 보람」을 누린다며 『돈이 많아야 여유있게 사는 것은 아니죠』라고 강조한다.
『하기야 저도 학생때는 남의눈에 띄려고 착한체하는 위선자로 보일까봐 마음이 쓰이고 웬지 겸연쩍기도해서 자선남비를 그냥 지나치곤 했지요』라며 동전이나마 서슴없이 집어넣고 흐뭇해하는 어린이들처럼 모두가 편안한 마음으로 기꺼이 춥고배고픈 이웃들과 정을 나누었으면 좋겠다고한다. <김경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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