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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루틴의 중요성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87호 24면

일러스트 강일구

우울감이 오래 지속되어 반 년 가까이 집에서만 지내던 중년 여성이 진료실을 찾아왔다. 첫 상담이 끝나고 약을 처방하고 다음 약속을 잡는데, 보호자가 내게 물었다. “어떤 음식을 먹는 게 좋을까요?” “약을 먹는 것 이외에 무슨 노력을 해야하죠?”


나는 “매일 일정한 시간에 자고 일어나세요, 입맛이 없더라도 식구들과 함께 하루 두 끼는 챙겨드세요. 하루에 한 번은 잠시라도 외출을 하세요. 그걸 꼭 지키면 되요. 간단하죠?”라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겨우 저거?’라는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진료실을 나갔다. 대단한 비방을 들을 줄 알았나보다.


우울증을 포함한 대부분의 정신질환은 일상의 루틴이 깨지는 것이 터닝포인트다.


앞의 여성과 같이 꽤 오랫동안 쳐진 상태로 지냈다면 루틴의 사이클을 다시 제자리로 돌리는 것도 큰 노력이 든다. 엄청난 일을 하는 것도 아닌 그저 먹고 자는 것을 제 시간에 하는 것만도 어렵다. 그러니 더욱더 좌절과 비관적 생각이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작가나 음악가 같은 예술가들은 자유로운 삶속에서 창작을 한다고 짐작한다. 하지만 대부분 성공적인 예술가들은 의외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매일 정해진 분량의 작업을 한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매일 오전 10쪽 분량의 글을 쓰고, 오후 1시부터는 사람들과 만나 점심을 먹는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침에 달리기를 하고, 간단한 식사후에 글을 쓰고, 오후에는 쉬고, 저녁에는 음악을 듣는 일상을 지킨다. 절대 무리하지 않고 일상의 루틴을 정확히 지켜나가려고 한다. 그것이 오랫동안 글을 쓸 수 있는 비결이라고 많은 작가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하루키는 “소설 한 편을 쓰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설을 지속적으로 써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라고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그의 루틴을 소개한 바 있다.


잠깐 반짝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잘 해나가기 위해서는 천부적 재능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일상 루틴을 만들어 철저하게 지켜나가는 것이다. 루틴이 무너지면 정신적인 정상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루틴을 회복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씻고, 집안 정리하고, 외출해서 일을 보는 생활이 버겁게 느껴지지 않아야한다. 최소한의 삶이 안정적으로 확보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서서히 안전하다는 느낌을 가진다. 우울속의 후회와 절망, 비관에서 벗어나 정상을 향한 디딤돌위에 설 수 있다. 우울증 치유의 목표도 생각만큼 높은 곳에 있지 않다. 내 경우 환자가 루틴을 별다른 어렵지 않게 해낼 때를 즈음해서 치료 종결을 결정한다.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 간단한 루틴을 해내기 힘든 조건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다. 사회 곳곳에서 주거난민과 최소한의 식사에도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기 때문이다. 정신건강을 위한 일상의 루틴이 어렵지 않게 사회적 지지망을 확보해주는 것이, 개인의 의지와 치료 문제로 돌리기 보다 우선돼야 할 시점이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jhnh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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