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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만의 행정」이젠 버리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우리나라 행정처럼 별칭이 많은예도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별칭은 보통 애칭이 많고 그반대가 적게 마련인데 우리의 행정은 전자보다 후자쪽이 훨씬 많은것 같다. 예컨대 눈치행정·졸속행정·과시행정·군림행정‥밀실행정등이 그러하고 전시행정이나 선심행정 또한 애칭이랄수 없을 것이다.
행정의 역사가 일천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상징하는 호칭이 이처럼 많고 그것도 배정아닌 부정적인 호칭이 붙여진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것이다.
행정이 국민을 위한 국민의 행정이어야 하는데 웃사람의 눈치만을 지나치게 살피거나 잘보이기 위한 행정을 폄으로써 눈치 또는 과시·전시행정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고 군림 또는 밀실행정이란 이름도 그동안의 행정이 너무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으로 운영되어온 탓이 아닌가 싶다.
요즘 시·도 예산편성 시기를 맞아 예산을 공개하라는 강력한 요구가 나오고 국민의 추가부담을 의미하는 교통요금이나 목욕값등 각종 관허요금 인상조치가 불쑥 튀어나올때마다 인상요인을 따져야한다는 소리가 높은것도 행정의 민주화에 문제가 있음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교과서대로라면 행정은 통치이념의 기본적이고 구체적인 실현수단이다.
우리나라 통치이념이 헌법을 바탕으로 해 민주성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있기때문에 행정 또한 이에 충실해야함은 두말이 필요없다.
행정은 능률성이나 효과성, 합법성과 형평성을 도외시할수없다.
그러나 행정의 핵심이라 할 민주성을 결여하고서는 참다운 행정이랄수없다.
행정의 민주성이란 공개와 참여를 축으로해 여론을 존중하고 이를 시책에 반영하고 국민에게 책임을 지는 행정이다.
또 국민의 사전·사후적 행정통제를 받고 행정의 분권화와 행정구제제도등 여러장치들이 원만히 살아서 제기능을 다해야만 하는것이다.
한때 정치는 없고 온통 행정만있다던 행정만능 시대에는 행정의 목표가 오로지 능율에만 있었다. 그당시는 민주성을 들먹이는것조차 터부시 했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상황도 달라졌지만 사회와 사회를 구성하는 인원도 변모했다.
대학 또는 초급대학을 졸업하는 수준 높은 인력들이 해마다 30만명가까이 배출돼 사회의 두터운 층을 이루고 있을뿐더러 인구의 도시화율도 50년대의 30%에서 70%로 반전됐다.
수출도 1천배 가까이 늘어났고 국민소득은 40배, 중학취학율은 42%에서 95%로 높아졌다.기업과 사업장도 무수히 늘어나 경험과 지식의 축적이 이뤄져 사물을 보는 안목이나 장식의 수준이 그때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높아졌다.
지난번 2·12선거를 두고 흔히들 「충격」 으로 표현하고 있다.『세상을 바꿔놓았다』 는 것이다. 그러나 그같은 놀라움이나 충격은 우리나라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보통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미처파악하지 못한데서 기인한것이다.
사회전체의 수위가 높아졌고 국민이 달라졌다는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못했던 소치일뿐이다.
관가에「바쁘다 바빠」가 한창 유행하고「소신있는 행정」과「강력한행정」이 무슨 행정의 표본인것처럼 자랑거리가 되고 우리나라의 엘리트가 행정에만 몰려있는것 처럼 운위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사정은 달라도 크게 달라졌다는 것을 직시해야 할것이다.
각계 각분야마다 적지않은 전문가가 있고 분야마다 두터운 엘리트층으로 구성돼 수출도 하고 빌딩도 짓고 첨단기술도 개발하고 있는 것이다.
행정의 엘리트는 이제 전체사회속의 한분야의 엘리트일 뿐이다.
성숙된 국민을 상대로 하는 행정은 무언가 달라져야한다. 멋과 품위도 갖추어야하고 세련되고 어른스러워야한다.
권위주의나 고리타분한 관료주의의 냄새나 색채도 지워야하고 독단이나 전횡도 청산해야 한다.
행정의 두 기둥이라할 규제와 급부의 두 행정가운데 규제만을 능사로 알아오던 행정양태를 급부행정쪽으로 방향의 전환을 서둘러야 할것이다.
자고나면 요금이 올라있고, 도시계획이 하루아침에 뒤바뀌고,국 민이 낸 세금으로 편성되는 예산이 모르는 사이에 짜여져 집행되는 행정은 이제 삼가해주었으면 한다. 이원달<본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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