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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한일국교정상화 20년맞아 다시찾아본 문명의 젖줄&&호칭·의전절차놓고 숱한 문제점낳아|국서엔 국왕아닌 「일본국원모」 호칭|쓰시마번서 국서빼내「일본국왕」으로 고쳐 들통난 예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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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역대 「도꾸가와」(덕천)장군의 거성이었던 에도 (강호) 성은 1868년 명치유신으로 막부정권이 무너지고 천황의 권위가 회복되면서 천황궁으로 바뀌었다.
지금의 「히로히또」(유인) 천황이 살고 있는 궁성이 바로 역대 우리 통신사 일행이 드나들었던 에도성이다.
천황이 군국일본의 상징으로 신격화되었던 기간에는 천황궁도 일반 서민이 접근할수없는 구름위의 성역이였다.
지금의 에도성-천황궁은 동경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빼놓을수없는 관광코스일뿐만 아니라 궁성을 둘러싸고 있는 5km의 순환도로는 점심시간에 샐러리맨들이 즐겨 찾는 조깅코스가 되어있다.
궁성앞에 줄지어 늘어선 관광버스와 깃발을 든 안내양의 뒤를 따르는 노랑머리 서구 관광객들의 행렬, 그리고 짧은 바지에 T셔츠차림으로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이고 무리를 지어 달리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동경의 새로운 풍물이다.
매년 1월2일과 천황의 생일인 4월29일에는 궁성내부가 일반에 공개되어 10만에 가까운 인파가 궁성뜰에 모여 방탄유리 너머로 모습을 보이는 천장에게 하례를 올리는 것도 외국인들에게는 좋은 구경거리가 되고있다.

<구름위의 에도성 지금은 관광코스>
지금의 천황은 상징적 존재이기는 하나 형식상 어디까지나 일본의 최고통치자다.
우리의 국가원수가 일본을 방문했을때 카운터파트는 천황이었고 신임 이규호 주일대사가 신임장을 제정한것도 천황이었다.
그러나 에도시대 조선조와 외교관계를 맺은 일본측 당사자는 막부의 장군이었기 때문에 호칭문제나 의전절차에서 적지않은 문제를 일으켰다.
7년에 걸친 임진·정유재란이 끝나고 일본에 「도꾸가와」 막부가 성립, 두나라사이에 국교정상화 교섭이 진행될때 우리 조선조측은 두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하나는 「도꾸가와」 가 직접 국서를 보낼것, 그리고 또 하나는 임진왜란때 왕조의 능을 파헤친 범인을 잡아 보내라는 것이었다.
범인 압송문제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할수 없는대도 쓰시마 (대마) 의 죄인 3명을 압송하는 것으로 낙착이 지어졌으나 국서를 보내는 문제는 간단치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전인 조선조초기 무로마찌(실정) 막부의 통신사 교환에서는 막부의 장군이 중국의 명으로부터 일본국왕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양국간의 국서에는 「일본국왕」 이라는 칭호를 썼다.
그러나 「도꾸가와」막부는 명과의 국교회복에 실패, 끝까지 중국과는 외교관계없이 지냈으며 국왕이라는 칭호도 받지못했다.
명을 정점으로하는 당시 동아시아의 책봉체제에서 일본은 완전히 소외되어 있었으며 이때문에 조선조와의 외교관계에서는 당연히 격이 문제가 됐다.
조선조측의 국서요구에 대해 막부측은 국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할수 없어 「일본국원모」 라는 호칭을 썼다.
그러나 조선조에서 이같은 호칭의 국서가 국서로서 받아 들여질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알고있던 쓰시마번에서는 번의중신 「야나가와」 (유천조흥) 가 중심이 되어 막부의 문서를 개작,「일본국왕」으로 칭호를 바꾸어 조선조에 보냈다.
말하자면 조선조와 에도막부의 선린우호관계는 출발에서부터 일본측의 간교한 기만술에 의해 얼룩져 있었던 셈이다.
쓰시마번의 농간은 30년동안 계속되다가 1635년 번의 내분으로 사실이 발각되어 「야나가와」 일족의 멸망으로 막을 내렸지만 일본측은 당시에도 성안에서 장군의 앞에 놓인 국서를 슬쩍 빼내 개작을 하는 대담한 모험까지 감행했던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있다.
어쨌든 사실이 발각된 뒤에도 조선조는 일본측의 사정을 양해하고 국교를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건이래 일본측은 국서에「일본국대군」혹은「일본국원모」라는 칭호를 썼다.
다만 「아라이·하꾸세끼」(신정백석) 가 통신사 접대역을 맡았던1711년 통신사 때만 그의 주장으로 「대군」이란 칭호를 폐하고 「일본국왕」 이라는 칭호를 공식으로 썼으나 1회에 그쳤다.
10월1일에 조선조의 국서를 전달한 신유한공 일행이 「요시무네」 (길종) 장군의 회답을 받은 것은 10일후인 10월11일이었다.
일본측 국서의 내용은 다음과같은 것이었다.
『일본국 원길종이 삼가 조선국왕 전하께 답서합니다.

<왕능, 도굴범 압송등 두가지 조건을 제시>
삼가 멀리서 와 친절히 방문해 옥체가 가승하심을 알게되니 만복이 함께 합니다. 방금 경사스런 징조에 응해 활법을 베풀어 옛법을 따라 새로운 경사를 닦습니다. 패물을 많이 보내시니 어떻게 보답하리오. 실로 두나라의 길이 변함없는 우의에 인함이며 또한 예의의 뜻이 매우 깊음을 압니다. 여기에 변변치 못한 물품을 신사의 편에 보냅니다. 정성스러움이 있음은 피차에 같습니다. 불비. 형보4년 10윌11일 원길종』 신공은 이미 관례로 돼 있는 이같은 호칭이나 국서전달의 의식에 대해 아무 시비를 걸지 않았으나 l764년 통신사때의 정사 조엄은 임금이 아닌 일본의 장군에게 4배의 예를 올리고 그앞에 예물을 늘어 놓는 절차에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
신유한공과 동시대의 이익이 그의 『성호사설퇴선』 에서 『일본국내에 천황에 대한 지지세력이 늘고 있는데 천황이 일본을 대표하게 되었을때 덕천장군과 대등한 관계를 맺고 있는 조선국왕은 명분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려는가』 라고 우려를 표시한 것도 조선왕조내에서 일고 있던 불만을 드러낸것이라고 할수 있다.
격의 문제는 조선의 대일 외교사에서 쉽게 설명되기 어려운 한 절목이다.
국서전달 절차가 끝난 이후에도 신공일행의 일정은 바빴다.
쓰시마번주의 에도저택에 초대되기도하고 서울서부터 데려간 우리측 마상재를 피로하는등의 공식일정외에 끊임없이 밀려드는 문객들과의 창화에 쉴틈이 없었다.
『해유녹』을 보자.
『연일 사관에 있으니 대수롭지않은 사객이 찾아오는 것이 잇닿는다. 시를 창화하고 필담으로 수작하느라 조금의 틈도없이 고되다. 밖에서 시와 글을 구하는 사람들이 잇달아 나는 너무 피곤해서 법이나 자못 사절하고 싶었으나 부득이 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행이 국서 전달의 사명을 마치고 에도를 떠난 것은 10월15일이었다.

<12회 5천여명 파유 접대에 막대한 비용>
이때의 모습을 보자.
『관문울 나서서 거리를 보니 사람들이 빽빽하게 떼지어 서서 손을 흔들면서 「잘가시오 잘가시오」한다.
우리일행 대소관원들은 용약 환희하기를 마치 고해에서 평온한 뱃길을 얻어 장풍에 돛을 단것 같다.』(『해유녹』) 무사히 일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기쁨이 절절이 그려져있다.
통신사의 l2차례에 걸친 일본왕래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평가가 나올수 있다.
17세기 중국에서 명나라가 멸망하고 만주족의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조선조의 양반계급은 『동방에 예의지국은 우리나라뿐』 이라고 주자학의 우등생을 자처, 일본에 대해서도 이같은 입장에서 저들을 깔봄으로써 일제36의 치욕을 감수해야 했던 사실도 당시의 한일관계를 보는 시각의 한 귀퉁이에 빼서는 안될 대목이다.
그러나 12회에 걸쳐 모두 5천3백55명이 참가했던 조선통신사의 파견이 당시 앞서있던 우리의 문물을 일본에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일본인들이 아무리 외면하려 한대도 가려질수 없는 사실이다.
1764년통신사때 일행이 만나 시문을 창수한 일본인은 1천명이 넘었다한다.
1711년 통신사일행의 파견에 일본측이 쓴 비용은 1백만냥이 넘었으며 동원된 인부 33만여명, 마필은 7만7천6백여필에 달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통신사가 당시의 일본에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는가를 웅변으로 말해준다. <끝> 글 신성순특파원
사진 신성순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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