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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와 공포 사이, ‘간지’ 벗어던진 조승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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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6호 30면

뮤지컬계 남녀 최고 스타 조승우와 옥주현의 동반 출연으로 일찌감치 화제를 모았던 하반기 최고 기대작 ‘스위니토드’의 막이 올랐다. 국내에선 2007년 초연 이후 9년 만에 리바이벌되는 무대지만, 늘 입소문은 자자했다. 완성도와 예술성 면에서 뮤지컬 매니어들 사이에 ‘전설’로 통하는 걸작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 뮤지컬 사상 가장 혁신적인 작사·작곡가이자 뮤지컬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 스티븐 손드하임의 대표작이다. 1979년 브로드웨이 초연 당시 ‘충격적인 걸작’이란 평가와 함께 토니상 최우수 뮤지컬상을 비롯 총 8개 부문을 수상했고, 한국 초연 때도 평단과 언론의 극찬을 받으며 더뮤지컬어워즈 최우수 외국뮤지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대중성은 인정받지 못했었다. 뮤지컬에서 흔히 기대하는 대중적이고 서정적인 멜로디가 아니라 불협화음을 사용해 불편하고 불안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음악과 육두문자가 난무하는 노랫말, 유혈이 낭자하는 복수의 드라마는 아직 뮤지컬 산업 초기로 가벼운 쇼뮤지컬 중심이던 2000년대 중반의 한국 시장을 파고들지 못했다. 당시 우리 수준에서 ‘어려웠다’는 얘기다.


2016년엔 상황이 달라졌다. 대략 엇비슷한 분위기의 유럽뮤지컬이나 쇼뮤지컬에 식상해 가던 우리 관객에게 ‘돌아온 스위니토드’는 새로운 대안이 될 법하다. 지난 4월 티켓 오픈과 동시에 주요 회차가 이미 매진됐다. 그동안 다양한 뮤지컬을 골고루 경험하며 내공을 다져온 팬들이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예술성 넘치는 70년대 브로드웨이의 혁명에 새삼 반응하기 시작했다고 할까. 조승우라는 최고의 티켓파워까지 가세한 결과인 만큼, ‘2016 스위니토드’는 예술성과 대중성을 다 잡았다 할 만하다.

19세기 영국. 15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이발사 스위니토드가 아내와 딸을 뺏고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터핀 판사를 향한 복수를 시작한다. 그를 흠모하는 파이가게 주인 러빗부인과 힘을 모아 인육 파이를 만들어 팔며 세상에 대한 분노를 해소하는 과정에 런던의 귀족주의와 산업혁명기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신랄한 풍자가 넘쳐난다.


부패와 음모·광기·복수·살인 등이 이 ‘스릴러 뮤지컬’을 관통하는 키워드들이지만, 음산하고 공포스런 무대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비극적 스릴러와 천연덕스러운 유머 코드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블랙 코미디다. 어딘지 아련하게 슬프면서도 통통 튀는 유머와 날카로운 풍자가 경쾌한 리듬을 타고 흐르는 극을 무심코 따라가다 마지막에 맞닥뜨리는 엄청난 반전까지. 숨겨진 퍼즐 조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시작부터 끝까지 긴장을 풀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무대는 몹시 단출하다. 회전이나 리프트 등 무대 전환이 거의 없이, 상징적인 3층 구조물 하나와 강렬한 조명만으로 파이 가게와 이발소, 런던의 거리 곳곳을 만들어냈다. 얼마 전 창작뮤지컬 ‘마타하리’와 오페라 ‘오를란도 핀쵸 파토’ 등에서 극도로 화려한 무대미술을 구사했던 오필영 디자이너의 작업이라기엔 지나치게 수수해 실망의 목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그런 ‘미니멀리즘’ 덕분인지 배우들의 연기가 부각된 것도 사실이다.


오랜만에 신작에 나선 조승우는 참신한 연기변신을 보여줬다. ‘지킬앤하이드’등 그간 대표작에서 보여준 ‘간지’는 과감히 포기했고, 특유의 파워 넘치는 솔로도 거의 없다. 시종 허름한 차림에 헝클어진 머리로 등장하는 그의 존재감을 세워준 건 상대 배우들과의 자연스런 연기 앙상블이었다.


작품 자체가 앙상블이 핵심이기도 하다. 솔로곡은 거의 없고, 대위법을 잔뜩 사용해 정신없이 엇갈리는 고난도의 이중창·삼중창·사중창이 스릴과 위트를 종횡무진한다. 백미는 1막 엔딩이다. 스위니토드와 러빗부인이 인육 파이 아이디어를 자화자찬하며 다양한 파이 종류를 장황한 노래와 춤으로 열거하는 박장대소 장면. “이건 변호사”“비싸겠는데”“주둥이만 살아 그런지 씹는 맛이 최고죠”“공무원 어때 아주 든든해”“꽉 막혔잖아”“그래도 엄청 잘나가 실속 넘치는 안전빵이라” 등 숨가쁜 리듬에 담긴 풍자와 유머를 찰떡호흡으로 소화하는 두 주인공에게 아낌없는 박수갈채가 터져나온다.


개막 전 ‘조승우와 옥주현의 만남’으로 화제몰이를 했지만 뚜껑을 열고 보니 전미도의 활약도 못지않다. 발성까지 확 바꿔 능청스럽고 방정맞은 러빗부인으로 완벽 변신해 정녕 ‘원스’와 ‘베르테르’의 사랑스런 그녀가 맞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2년 전 『파우스트』의 악마 메피스토텔레스로 분했던 연극 ‘메피스토’가 떠올랐다. 그간 다양한 연극과 뮤지컬을 넘나들며 갈고 닦은 연기 내공이 제대로 빛을 발한 것이다. 최고의 무대는 꼭 ‘스타’가 만드는 게 아닐 수도 있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오디뮤지컬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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