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의 '삶과 믿음'…"신부님, 하루도 잊지 않은 평양, 꿈속에서라도 가고 싶습니다."

오래 전에 받은 메일 중 하나를 오랜만에 꺼내 읽었다.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 메디컬센터 원장 이병갑 선생님의 메일이었다. 이병갑 선생님은 NASA 원장직을 은퇴했다가 몇 년 전 다시 미 정부에서 원장으로 취임시킬 정도로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이다. 우연한 기회에 선생님을 알게 되어 가끔 인사와 안부를 나누었다. 그분은 이국 생활의 고뇌와 가족들의 이야기를 쓴 편지를 간간이 보내왔다. 은퇴 이후 여행 중에도 편지를 보내왔는데, 팔순을 노신사의 편지는 내용과 깊이가 특별했다.

삶과 믿음
노신사의 편지-허영엽 신부(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장)

‘6·25를 기억하며…’

여러 편지 중에 눈에 띄는 제목이 있었다. 긴 편지의 내용은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는 회고록이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6·25 전쟁이 난 직후, 당시 17살이었던 그는 평양 시내에서 인민군에 붙잡혀 소년병으로 전선에 보내졌다. 부모님과 한마디 인사도 못하고 외출 중에 길에서 갑자기 군용 트럭에 태워진 것이었다. 말이 군인이지 변변한 무기도 없이 그야말로 총알받이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됐다. 다행히 여러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패잔병으로 북상하다가 하루는 너무 배가 고파서 밤중에 음식을 훔치려 마을로 내려왔다고 한다.

경상북도의 아주 작은 시골이었는데 마을로 들어가서 좀 큼직한 집을 발견하여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창문을 통하여 안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 반짝 빛나고 있는 십자가가 건물 내부 정면에 걸려있었다. 배고픔도 잊고 그만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었던 그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용기를 내어 탈영을 했다. 인민군에게 발견되면 탈영병으로 총살당할 것이고 또 한국군에게 잡혀도 그 자리에서 총살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목숨을 걸고 깊은 산속으로 도망을 쳤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나 한국 해군 군의관이 된 이병갑 선생은 그때의 작은 성당을 찾아보려고 경상북도의 여러 곳을 둘러보았지만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가끔 상념에 젖는단다. 만약 그날 밤 작은 성당에서 그 십자가를 보지 못했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그 후 미국 유학을 떠나 미 해군의 군의관이 됐다. 인민군, 한국군, 미군…. 세 나라의 나라의 군복을 입어야 했던 그의 기구한 운명과 고통을 어림잡아 짐작할 뿐이다.

한국인 어느 누구도 6·25 전쟁의 고통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 역사에서 또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꼭 기억해야 하는 비극의 역사이기도 하다. 가장 지혜롭지 못한 것은 불행의 역사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병갑 원장님 편지의 마지막 구절이 오랫동안 가슴을 울렸다. “신부님, 하루도 잊지 않은 고향, 평양의 거리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며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죽기 전에 꿈속에서라도 꼭 가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