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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수치심과 함께, 수치심 없는 듯 살기 위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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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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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
소설가

그는 마음속에서 항상 수치심을 억누르며 살았다. 분노하거나 두려워하는 자신에 대해, 과잉의 성충동과 거짓말 습관에 대해, 인정받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는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했다. 그는 미국 심리학자 존 브래드쇼다. 『수치심의 치유』라는 책에서 그는 자신이 갇혔던 수치심의 폐쇄회로에 대해 고백한다. 수치심을 느끼지 않기 위해 맡은 일을 완벽하게 해내려 했지만 완벽주의 기질에 대해 다시 부끄러워졌다. 수치심과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20대 초반부터 신학 공부와 수도 생활에 매진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수치심에 중독돼 있음을 알아차렸다. “우리는 숨긴 만큼 병든다”는 치유 프로그램 명제에 따라 억압해 온 수치심을 표현함으로써 회복의 길로 돌아설 수 있었다.

많은 현대인이 내면에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억압한 채 살아간다. 그 감정이 폭발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어떤 이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기 위해 맡은 일을 완벽하게 해내려 애쓰고, 타인의 통제를 받지 않을 정도의 권력을 갖고자 한다. 어떤 이는 부끄러움이 느껴질 때마다 벌컥 화를 내 분노로 수치심을 덮는다. 자신의 수치심을 모두 타인을 향해 투사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타인의 행동을 윤리적 잣대로 판단하면서 도덕적 비난의 언어를 즐겨 뱉는다. 죄의식과 수치심을 좋은 행동으로 상쇄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봉사 활동이나 이타적 행동에 매진하는 친절한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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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내면에 만들어지는 최초의 수치심은 부모의 잘못된 메시지에서 비롯된다. 역기능 가정의 부모가 쏟아내는 비난과 판단의 언어는 아이 마음에 대못처럼 박히는 수치심이 된다. 성장하면서 형제와 비교당하는 양육 환경, 등수를 매기는 학생 평가 시스템, 벌 주는 종교 이미지, 성공 신화를 유포하는 사회 분위기 등이 개인의 내면에 반복적으로 수치심과 열패감을 심어준다. 억압된 수치심은 마침내 강박적 행동과 중독 증상의 원인이 된다.

“현대 사회는 심하게 중독돼 있다. 6000만 정도의 성적 학대 피해자, 7800만 정도의 알코올 중독자, 1500만 이상의 폭력 가정이 있다. 섹스 중독과 일 중독에 관한 통계는 없지만 도박 중독자는 1300만 정도라는 수치가 나와 있다.” 『수치심의 치유』가 발간된 1988년의 미국 사례지만 남의 나라 얘기 같지 않다. 지난번 원고에서 진지한 작별 인사를 해놓고 또 원고를 보낸다. 면구스러운 마음과 함께, 미미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