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서] 탈세하다 무너진 경제首長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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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경제사령탑이었던 앤서니 렁 재정사장은 '차이예(財爺.부자 아저씨)'라고 불린다.

올해 51세로 금융계에서 잔뼈가 굵어 한 미국계 은행에서 연봉 2천만 홍콩달러(약 32억원)를 받는 최고위직까지 올라갔다. 2001년 2월엔 둥젠화 수반의 삼고초려(三顧草廬)를 받아들여 내각의 부총리급으로 들어갔다.

아파트.상가를 9채나 갖고 있는 데다 지난해엔 중국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다이빙 스타' 푸밍샤(伏明霞.24)를 두번째 아내로 맞아들였다. 지난 2월 하순엔 예쁜 딸까지 얻어 남 부러울 게 없었다.

그러나 지난 3월 터진 '승용차 스캔들'은 그의 운명을 어처구니없게 바꿔놓았다. 그는 고급승용차를 살 때 매기는 세금의 세율을 1백50%로 올리기 전에 두 대의 차량을 사들였다. 세금이 오르면 차값이 오를 것을 예상해서다.

홍콩 언론들이 탈세 의혹을 제기하자 "새로 태어난 아기를 위해 산 것"이라고 변명했다. 그리곤 "절세 금액 10만 홍콩달러를 자선 기금으로 내놓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자동차 대리점에서 사실은 "19만 홍콩달러의 세금을 덜 낸 것"이라고 폭로하면서 그에 대한 신뢰는 분노로 급변했다.

홍콩 경제가 1997년부터 불황의 늪에 빠진 마당에 경제 사령탑이 일신의 소리(小利)에 몰두했다는 비난이 빗발쳤다.

홍콩인들의 상처받은 마음은 최근 가두 시위에서 잇따라 표출됐다. '홍콩판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친중.반중 세력의 대치 과정에서 "앤서니 렁은 도덕적으로 물러나야 할 사람"이라고 집중 공격을 받은 것이다.

홍콩 언론들은 "그가 재정사장으로 있으면서 실업률은 4.5%에서 8.3%로 올라갔고, 재정 준비금은 1천1백83억 홍콩달러나 줄어들었다"고 비난했다.

홍콩 경제가 나빠진 게 그의 책임만은 아니지만 한번 등을 돌린 민심은 싸늘하기만 했다. 반부패 수사기관인 염정공서는 그의 직권남용을 인정하는 쪽으로 보고서를 냈다.

그는 재정사장 취임 당시 "돈은 벌 만큼 벌었으니 돈에 구애받지 않고 홍콩을 위해 봉사하겠노라"고 호언했다. 하지만 17일 오전 기자들의 질문 공세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초심을 지키지 못해 자초한 쓸쓸한 퇴장이었다.

이양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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