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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 2035

본의 아니게 애국하고 있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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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현 기자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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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
JTBC 경제산업부 기자

주변에 애국자를 자처하는 언니들이 늘고 있다. 육아휴직이 끝나 베이비 시터에게 아기를 맡긴 워킹맘 언니들 얘기다. “월급에서 교통비·점심값 빼면 고스란히 시터 이모한테 간다”며 내 손에 남는 돈 없이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을 늘리고 있으니 애국자라는 논리다. 계획에 없던 둘째까지 낳은 언니들은 “요즘 같은 저출산 시대에 대한민국 미래 경제활동인구를 하나 더 늘린 것이 얼마나 애국이냐”며 한술 더 뜬다.

결혼 준비를 하는 친구들 얘기를 듣다 보면 예비 신부들도 애국자 같다. 도대체가 웨딩 산업엔 그냥 부르는 게 값인데 가격 깎는 재주가 없으니 웨딩홀 들어가기도 전에 빈털터리 신세라는 푸념이다. 발품 팔아 ‘셀프’로 준비하는 ‘스몰 웨딩족’도 늘고 있다는데 대부분은 찜찜하지만 그냥 달라는 대로 내는 수밖에 없다. 불황이라 커피값도 아까워 편의점 커피를 찾는다는데 이 정도 소비면 내수 진작에 기여하는 애국이 아니겠나.

전셋집 찾아 3만 리인 젊은 부부들은 또 어떤가. 둘이 열심히 모은 돈에 억대 대출까지 더해 몽땅 집주인에게 맡긴다. 전세 매물이 씨가 말라 반전세로 입주해 매달 꼬박꼬박 적금처럼 월세를 내는 경우도 늘고 있다. 집주인은 대체로 부모님 또래나 혹은 그 위인데, 결국 고령화 시대 중장년층 노후 대책에 일조하는 셈이다. 2년 지나면 전셋값이 뛰어 다시 서울 외곽으로, 경기도로 조금 더 밀려난다. 덕분에 외진 동네가 개발되고, 그 동네 집값은 2년 동안 또 오를 테니 이 또한 지역 균형 발전에 기여하는 애국이겠다.

지난 4월 배우 송중기를 만난 박근혜 대통령은 “‘태양의 후예’로 바쁜 와중에 관광 홍보대사를 맡아 드라마에서뿐 아니라 실제로도 진짜 청년 애국자”라고 말했다. 5월엔 “청년을 위해 일자리를 창출한 중소기업인 모두가 자랑스러운 애국자”라고, 지난달엔 “노사가 국가의 미래를 위해 조금씩 양보하는 미덕을 갖는 것이 국가 경제를 살리고 모두를 살리는 애국”이라고 했다.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생각하는 애국은 좀 더 소박하다. “경제적 여유 있는 분들이 여름휴가를 해외가 아닌 국내에서 보내면서 돈을 써 주는 것이 애국”이라 강조한다.

그렇다면 요즘 젊은이들이 애국자라는 말이 ‘택도 없는’ 소리는 아닌 것 같다. 한류 덕에 광고료 수백억원을 벌어들이는 배우가 한국 관광 홍보 모델을 맡은 것이나 회사의 구조조정에 희망퇴직 신청을 내는 것이 애국이라면, 남들처럼만 평범하게 살아보겠다고 보육비며 집값이며 국민연금이며 달라는 대로 다 내는 청년들이 애국자가 아닐 이유도 없어 보인다. 본의 아니게도 우리는 하루하루를 버티며 애국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 현 JTBC 경제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