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사태의 긴박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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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필리핀의 위기가 최근 다시 긴박해졌다.
공산게릴라의 난동이 극렬화하고 재야민주세력의 반정부시위가 가열된 가운데 미국은 「마르코스」대통령에 대해 내정개혁을 촉구하고 나섰다.
필리핀의 내정악화에 대해 비교적 신중한 자세를 견지해온 미국이 적극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현 사태가 개선되지 않는 한 필리핀은 5년 내에 중남미형의 군사독재가 들어서든가, 월남형의 공산화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판단에 기초하고 있다.
「레이건」 대통령은 최근 그의 친구인 「폴·랙설트」상원의원을 마닐라에 보내 조속한 정치개혁을 통해 헌정을 정상화하도록 촉구했다. 「랙설트」 특사는 공석중인 부통령의 선임, 부패한 군부의 개혁, 차기 선거의 공명보장을 권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이 같은 개혁만이 공산게릴라의 위협을 방지하고 파탄된 경제를 회복하여 필리핀과 아시아 자유진영의 안보를 강화할 수 있다는 논거위에 서있다.
변호사 출신인「마르코스」가 65년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그의 인기는 대단했고 정권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세력은 아무 데도 없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존슨」은 『아시아에서의 나의 강력한 오른 팔』 이라고 「마르코스」를 격찬했었다.
그러나 실정을 거듭하면서 족벌정치가 뿌리를 내리고 족척과 신복에 의한 부패가 만연하자 국민의 반발이 표면화됐다. 남부의 여러 섬을 근거로 한 공산세력은 다시 주민의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이에 「마르코스」는 72년 9월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민주세력의 반발과 공산군의 저항은 오히려 강화됐다.
「마르코스」는 국민의사와는 유리된 신헌법을 만들고 계엄령을 연장하여 정권을 연장해 나갔다.
이 같은 반헌정적 통치의 계속으로 정권의 정통성이 의심받게 됐다.
필리핀군부가 야당지도자 「아키노」를 살해한 뒤에는 「마르코스」정부의 정통성 위기가 절정에 이르렀다.
지금 야당과 종교계·학생·노동자 등 재야민주세력은 한 덩어리가 되어 정부에 도전하고 있다. 그러나「마르코스」를 대신 할만한 인물이 없다는 점이 최대 약점이다.
필리핀 공산당의 무력단체인 신인민군(NPA)은 1만명 이상의 병력을 유지하면서 필리핀 국토의 20%를 장악하고 있다.
경제 또한 절망적이어서 실업율 36.5%에 2백 60억 달러의 외채를 안고 있다. 경제성장률은 지난해의 마이너스 5.5%성장에 이어 올해도 그 같은 추세가 계속되고 있고 작년 4월 이후 4개의 은행이 문을 닫아야했다.
「마르코스 정권을 떠받치고 있는 유일한 세력은 군부다. 그러나 그 군부마저 「아키노」 피살 후 분열되어 있다.
지금은 영관급이 주축이 된 다수의 개혁파 장교들이「마르코스」정부에 대해 온건하지만 지속적으로 개혁압력을 가하고 있다.
사태는 「마르코스」에 의한 개혁으로는 해결되기 어렵다는데 위기의 심각성이 있다. 그러나 지금「마르코스」를 대체할 만한 세력은 군부밖에 없다.
필리핀은 민주주의의 시련을 겪고 있는 아시아 국가일 뿐 아니라 6.25동란과 월남전에서는 우리의 전우국가였고 지금은 우리의 후방기지가 돼있는 미국의 군사거점이기도 하다.
필리핀의 공산화는 물론 군사 독재화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마르코스」의 애국적 용단이 내려져 60년대 이전의 민간정부에 의한 헌정이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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