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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국인 아닌 유럽인" 뒤늦게 번지는 후회와 분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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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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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유럽공화국을 꿈꿨던 윈스턴 처칠 전 총리의 동상이 우뚝 서 있는 영국 런던의 의회광장. 27일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의 사퇴 요구에 반대하는 3000여 명의 시위대가 모였다. 노동당 예비 내각 장관 12명이 코빈의 퇴진을 요구하며 사퇴한 데 대한 반발로 시위가 조직됐다.

고정애 특파원 런던 현장 르포
탈퇴파 장담과 달리 경제 혼란
의회광장 3000명 재투표 요구 시위

이곳에서 만난 로런 킹엄은 ‘유럽에게, 우린 여전히 당신을 사랑한다’는 글귀를 들고 있었다. 그는 “나는 여전히 헝가리·불가리아·라트비아·히스패닉과 함께 일한다”며 “유럽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어 “브렉시트 투표 결과에 울었다. 나를 대표하지 않는다. 제2 국민투표를 요구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주변에선 ‘난 영국인이 아니라 유럽인이다’ ‘유럽연합(EU)이 옳다(Yes to EU)’란 글귀가 보였다. ‘편협성·파시즘에 반대, 보리스·패라지·고브의 탐욕에도 반대’란 문구도 있었다. 탈퇴 운동을 이끈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과 영국독립당의 나이절 패라지, 마이클 고브 법무장관을 향한 비판이다.

이곳으로부터 200㎞ 떨어진 글래스턴베리에선 26일 세계적인 록 페스티벌이 열렸다.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는 음악인과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들이 함께 어울린 자리였다. 이날 마지막 공연을 한 세계적 록밴드 콜드플레이의 리드 싱어 크리스 마틴은 “브렉시트 투표 이후 나라의 붕괴를 목격하고 있다”고 통탄했다. 그는 투표 직후 “유럽 안팎에서 활동하는 밴드로서 이번 결정이 우리를, 또 우리 세대나 우리를 뒤따를 세대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글을 남겼다.

영국에서 브렉시트를 후회하는 리그렉시트(Regrexit·Regret+Brexit)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했다. 국민투표 이후 혼란상을 보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는 것이다. 탈퇴 진영의 장담과 달리 세계 경제가 곤두박질치고 영국도 어수선해졌기 때문이다.

탈퇴 진영의 말 바꾸기 또는 뒷걸음질도 이어졌다. 라이언 윌리엄스(19)는 “투표소에서 1분 정도 망설였는데 친구들이 잔류가 많아 반격한다는 의미로 탈퇴를 선택했다. 변화하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며 “이젠 이런 내가 싫다”고 말했다. 유럽으로 가려다 환전소에 들렀던 이는 “1파운드=1유로, 잘 가라 보리스”란 글을 트윗했다. 국민투표 전엔 1파운드를 내면 1.3~1.4유로 정도는 받았다.

정치권과 언론계를 중심으론 “어떻게 하면 EU에 잔류토록 할 수 있느냐”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EU 탈퇴를 공식 요청하는 리스본조약 50조 발동을 지연하다 보면 새 총리도 브렉시트 혼란상 때문에 결국 발동하기 어려워지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영국 가디언에 실렸다. 국민투표가 자문 성격인 만큼 의회가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팀 패런 자유민주당 대표는 “총선 공약으로 EU 잔류를 내걸겠다”고 말했다.

노동당의 데이비드 라미 의원은 “전체 하원의원 650명 중 500명은 잔류 의견”이라며 “브렉시트 관련 법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의원들이 투표권을 행사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 먼지가 가라앉고 브렉시트 이후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탈퇴 계획을 두고 국민투표를 다시 해야 한다”고 했다.


▶관련 기사
① 영국 국민 속인 브렉시트 공약

② 독일 “영국 EU 탈퇴 먼저 밝혀라”
③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거냐” 뒷감당 못하는 영국



이런 가운데 존슨 전 시장이 신문 기고를 통해 “탈퇴 지지자들도 52대 48이 압도적인 게 아니란 걸 받아들여야 한다. 영국은 EU 단일시장에 접근할 수 있다. 유일한 변화는 EU의 불투명한 입법 과정과 항소할 수 없는 유럽재판소에서 빠져나오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노르웨이식 유럽경제지역(EEA) 모델에 가깝다. 잔류파 진영이 “분담금은 더 내고 이민 제한도 못하는데 EU의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없다. EU 잔류가 낫다”고 했던 방안이다.

니컬라 스터전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은 존슨 전 시장의 뒷걸음질에 “익살극 프로젝트(Project Farce)가 벌어지고 있다”고 조롱했다. 존슨 전 시장이 브렉시트 위험성을 경고하는 잔류파를 향해 “‘공포 계획(Project Fear)’이 진행 중”이라고 비난했던 걸 되받아친 것이다.

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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