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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1000일의 소망, 라면을 끓이는 그 마음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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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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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
소설가

한 법회에서 강사 스님이 대중에게 질문했다. “라면을 끓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냄비·물·불 등의 대답에 고개 젓던 스님이 마침내 답했다. “라면을 끓여야겠다는 마음이 먼저 있어야지요.” 불가에서는 인간 존재도, 이 우주도 한 점 어리석은 마음(無明)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 팔만사천 법문이 마음 심(心) 한 자로 귀결되는 근거이기도 하다.

2014년 1월 말부터 이 지면에 글을 썼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댄 점, 먼저 사과 드린다. 2016년 6월이면 얼추 1000일쯤 지난 셈이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지인·독자·남성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린 점도 용서를 구한다. 원고 보내는 날 아침 책상에 앉으면 “제가 쓰는 글이 저와 독자, 공동체에 유익하기를” 기도했다. 그럴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과대망상적 소망을 품었던 점도 참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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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할 업(業)을 쌓는 일임을 알면서도 글을 시작한 이유가 있었다. 심리의 시옷자도 듣기 싫어하는 남자들이 자신의 내면에도 마음이라는 것이 있음을 알았으면 싶었다. 퇴근길에 현관문을 열며 집구석이 이게 뭐냐고 소리 지르기 전에 “여보, 요즈음 회사 일에 스트레스가 많아”라고 말했으면. 이별을 요구하는 연인에게 폭력을 휘두르기 전에 “혼자 남겨지는 일이 죽을 만큼 두렵구나” 알아차렸으면. 알코올·도박·게임 등에 몰두해 가정을 소홀히 하기 전에 “여보, 나는 친밀한 관계를 맺는 일에 서툴러. 당신이 도와줘” 말했으면. 자녀에게 공부하라고 윽박지르기 전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아이에게 떠넘기고 있구나” 이해했으면. 내면 마음을 알아차린 남자들이 스스로를 돌보고 위로하고자 마음먹었으면. 글을 시작할 때 그런 소망이 있었다.

물론 그 뒤에는 이기적인 소망도 있었다. 이 땅에서 현직 여성으로 살아가는 입장에서 덜 위험하고 덜 불합리한 세상을 만나고 싶었다. 딸들에게는 더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넘겨주고 싶었다. 그런 까닭에 남자들이 바깥으로 내던지기만 하는 그 마음이 자신의 인생을 만들고, 자녀의 성격과 미래를 만들고, 가정의 향방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싶었다. 그 마음으로 라면을 끓이든 세상을 부수든 그들 마음이겠지만, 이왕이면 그 마음으로 공동체의 안전과 평화, 자녀 세대의 행복을 만들기로 마음먹었으면 싶었다. 1000일 동안 남자들의 변화를 기대하며 통제의 언어를 투사했던 점을 참회하면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