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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감기약의 대명사 「아스피린」만드는 서독 바이에르그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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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아스피린으로 유명한 서독 바이에르 (Bayer) 그룹은 의약품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으나 「의약품이미지」를 넘어 사업영역이 다방면에 이르고 있다.
사진필름으로 유명한 아그파와 석유화학분야의 에르묄 헤미, 서독최대의 합성고무메이커인 부나베르케 휠스가 바이에르의 계열회사다. 그룹의 모회사는 바이에르AG사로 아스피린 등 의약품으로 유명하다.
그룹내 모두 1백14개 계열회사에는 23만명의 종업원이 1만6천8백가지의 제품을 만들고 있으며 갖고 있는 세계특허만도 10만6천여종이나 된다. 세계1백40개국에서 바이에르 제품을 사용하고 있다.
바이에르 경영의 요체는 「기술」. 최고경영자는 물론 중역의 대부분이 화학공학자 출신이다. 레베르쿠젠에 있는 본사에만도 1백50여명의 과학자가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바이에르가 지금까지 배출한 노벨상 수상자만도 14명이나 된다. 대표적인 예가 1939년 노벨의학상 수상자인 「게르하르트·도마크」박사다. 그는 1925년 폐렴의 특효약인 최초의 항균 설파제프로토실을 개발, 노벨상을 탔다.
바이에르의 해외부문을 합한 84년 매출액은 1백97억4천9백만달러 (16조7천8백66억원). 국내1백개 제약회사의 84년 총매출실적 1조5천8백45억원의 10배가 넘는 액수다. 국내 최대 그룹인 삼성과 현대의 84년 매출액을 합한 2백5억달러에 거의 맞먹는다.
84년 순이익은 6억1천1백만달러 (5천1백96억3천3백만원)로 국내 10대그룹의 총이익 4억8천8백만달러 (4천1백48억9천6백만원)를 훨씬 앞지른다. 끊임없는 연구개발로 높은 부가가치의 상품을 개발, 엄청난 이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제품개발에 쏟은 연구개발비만도 총매출액의 5%인 9억9천만달러 (84년)에 이른다.
전체 매출액중 의약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21%. 농약과 일반화공약품이 각각 17·8%를 차지하고 있으며 플래스틱이 14%, 폴리우레탄 11%, 염료 8%, 섬유 4%, 고무 7%다.
끊임없는 사업확장과 기술지상주의의 경영방식이 오늘의 바이에르를 만든 것이다.
바이에르가 출발한 것은 1863년. 루르지방 남부의 조그만 도시 바르멘에서 약국을 경영하던 「프리드리히·바이에르」가 친구이자 기사인 「요한·베스코트」와 합작, 바이에르 염료제조회사를 만들었다. 그때의 종업원은 1명. 아닐린이라는 염료를 첫 제품으로 내놓았다.
유럽의 염료공업은 1856년 영국의 18세 소년화학자 「퍼킨」이 콜타르에서 염료합성을 성공한 이후 주로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했다. 그러나 186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일에서도 「펠릭스·호프만」이나 「어게스트·케쿨러」「엥겔호른」등 유능한 화학자가 속출, 바이에르외에도 훽스트·아그파·BASF 등의 염료회사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특히 1868년 BASF의 창설자 「엥겔호른」이 적색염료의 공업학에 성공, 독일염료공업은 영국이나 프랑스를 앞지르게 되었다.
바이에르도 1870년부터는 적색염료를 생산, BASF나 훽스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력기업으로 자랐다. 독일특허법이 제정된 1877년에는 매일 6천kg의 적색염료를 생산, 독일의 염료공업을 리드하기 시작. 이 때의 종업원은 1백36명. 창설때의 1명, 그리고 그해 말 12명이었던 종업원은 11배나 늘어났다.
1899년에는 연구원이었던 화학자 「펠릭스·호프만」이 아스피린을 개발, 페니실린의 발명과 견줄만한 설파제의 획기적 발명을 이룩했다.
사업이 확장되자 바이에르는 1907년 쾰른부근의 라인강변 레베르쿠젠에 새 공장을 건설, 이 곳으로 회사를 옮기면서 「카를·두이스베르크」가 새 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바이에르의 공로자이자 후에 대기업의 공동체인 IG팔벤을 설립한 주역.
「두이스베르크」가 바이에르에 입사한 것은 22세때인 1883년.「두이스베르크」는 독일화학업계의 강력한 기업집중을 주장했다. 1904년 바이에르·BASF·아그파 3개 회사연합이 그의 노력으로 형성되었다. 그는 보다 큰 규모의 통합을 꿈꾸었지만 사장직을 맡은 지 2년후인 1914년 1차대전이 터지자 그의 구상은 잠시 중단되고 말았다.
1차 대전은 독일화학공업에 가혹한 시련을 안겨주었다. 기업집중을 추진하려던 「두이스베르크」의 꿈은 다시 자극을 받았다. 결국 1916년 바이에르·훽스트·BASF·아그파·카세러등 염료경쟁메이커 8개회사가 제휴, 독일염료이익공동체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8년뒤인 1924년 이 8개회사를 통괄하는 지주회사인 IG팔벤이 설립됐다. IG의 사장으로는 바이에르의 「두이스베르크」가 추대되어 1935년 사망하기까지 10여년간 독일화학업계의 최고 책임자로 군림했다.
IG는 독일화학공업 생산의 3분의1이상을 수중에 넣었으며 해외의 기존기업을 사들이거나 계열회사를 세움으로써 다른 나라의 화학업계에까지 두려운 존재로 나타났다.
IG팔벤은 2차대전중 나치독일의 정치판도가 확대되면서 해외사업도 더불어 강화되었다. 나치독일의 전성기에는 유럽각처에서 약 6백개의 공장을 지배했고 40만명이 넘는 종업원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패전으로 IG도 엄청난 수난을 겪어야했다.
IG의 해체문제는 연합군 사이에 이견이 분분했다. 한때는 43개의 기업으로 나누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IG의 숨통을 터주는 계기가 되었다. 미소 대립이 격화됨에 따라 연합국측은 서독을 동맹국으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1951년 연합국측대표, IG의 주주·간부 및 종업원들의 대표들이 모여 협의한 결과 IG는 해체하되 바이에르·훽스트·BASF 3개 회사를 다시 부활시키기로 했다.
따라서 바이에르는 IG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공장외에도 사진필름의 아그파 (91·5%주식소유)의 지배권을 땄으며 서독에 남아있던 IG자산의 32%를 인계받았다. 나머지 IG자산은 훽스트가 27%, BASF가 28%, 휠스가 10%, 카세러가 3%씩 가졌다.
1953년 이후 바이에르의 재건은 그야말로 「라인강의 기적」의 대표적 케이스였다. 전쟁중 폐허가 된 각 공장이 1955년에는 전쟁전의 생산수준을 회복했다.
50년대 후반에는 새로운 분야인 플래스틱·합성섬유·컬러필름 등에 손을 댔다.
57년에는 영국의 석유회사 BP (British Petroleum)와 50%씩 합작투자, 에르묄 헤미사를 세웠다. 에르묄 헤미는 유기화학용 기초원료로 쓰이던 석탄을 석유로 전환하는 대규모 석유화학센터다.
같은 시기에 바이에르는 해외진출에도 힘을 쏟았다. 전쟁전의 해외사업망을 재정비, 가동했다. 1957년에는 캐나다에 지주회사인 바이포린을 세우고 이곳을 중심으로 세계각처에 투자활동을 벌였다. 바이포린은 현재 바이에르와는 별도로 1백개 이상의 계열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흥미있는 일은 바이에르가 사업규모를 확장하면서도 훽스트·BASF등 전 IG의 3개회사끼리는 서로 경쟁을 피하고 협력을 꾀한다는 사실이다. 그 뿐더러 이 3개회사는 IG해체 후에도 공동으로 자본참여, 많은 사업을 벌여왔다.
바이에르는 돈을 버는데만 그치지 않는다는 경영전략을 갖고 있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환경보호를 위한 시설과 연구에도 막대한 비용을 투자하고 있다. 종업원을 위한 후생·복지시설면에서 세계굴지의 기업들을 리드하고 있다. 의료보호책·노후대책의 보장뿐만 아니라 최신의 설비를 갖춘 어학실습실, 칠만여권의 장서를 갖춘 도서실, 50여개의 스포츠·문화·오락클럽 등이 그러한 예로 꼽힌다.
바이에르는 『경제적인 성장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생활환경을 강조하는 데에 가치가 있다』는 OECD의 조언을 가장 성실히 따르는 기업임을 상기시키며 좋은 이미지의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바이에르는 지난 72년 우리나라에도 진출, 50대50의 출자로 한국바이엘약품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한국바이엘의 84년 매출액은 1백96억원. 4백명의 종업원이 20여종의 의약품을 생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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