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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42)제83화 장경근 일기(23)-본지 독점게재|"비밀로 해달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60년11월15일
호젓한 한밤의 바닷가에 웬 휘파람 소리일까. 다가가 보니 배에 함께 탔던 노인이다. 동행한 여인들을 찾는다고 했다. 얼마 지나 여인 2명과 어린이 셋이 와 그들은 떠난다. 노인은 밀항 왕래를 몇차례 한것 같아 보였으며 부탁을 받아 여인들의 안내를 맡고 있는 듯했다. 우리도 동행할 것을 청해 그들 뒤를 따랐다. 노인에게 여기가 어디쯤 되느냐고 물었더니 요부꼬(호자) 같다고 대답했는데 나중에 보니 요부꼬도 우리 상륙 지점과는 먼거리다.
우리는 노인을 따라 3시간 가량 산속을 헤맨 끝에 비로소 인가를 발견했다. 산촌마을인데 사람이 있는듯해 숨어 가다 노인 일행을 잃어버리고 우리 셋만 길을 더듬어 내려 갔다. 수통에 남았던 물도 나 혼자 몇모금 마셨으나 그것도 떨어졌다. 나도 목말랐지만 만순과 이군은 갈증으로 쓰러질 형편이다. 한참 나아가니 외딴 곳에 집이 보인다. 오구라에서 기동선을 타고 어선대를 따르고 있다가 기관고장으로 이 부근에 상륙했다고 거짓으로 둘러대고 하룻밤 재워주기를 청했으나 방이 없다고한다. 부근의 여관이나 어디 숙박할 곳이라도 안내해, 달라고 사정했다. 그 집 노파가 부근 잡화점으로 안내해 준다. 이미 자정을 지나 가게문을 닫고 있다. 노파가 잡화점 주인을 불러주어 하룻밤 묵어가자고 간곡히 청했으나 역시 방이 없다고 거절한다. 부축받고 있는 내가 거의 기진상태인데도 너무 메마르다. 바닷가 사람들이라 우리가 한국인 밀항자이려니 해서 경계하고 경원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 형편이 딱해 보였던지 잡화접 주인이 길 안내에 나서 준다. 그를 따라 그가 아는 어느집으로 갔지만 그곳에서도 거절이다.
잡화점 주인은 여관도 먼거리에 있으니 차라리 택시를 불러 가라쓰(당진)까지 가 그곳에서 여관에 둘러 쉬고 내일 오구라로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의 안내에 따르기로 했다. 그를 따라 얼마쫌 가니 극장이 있고 버스 정류소다. 시간이 늦어 버스는 끊어졌는데 형사인듯한 세사람이 극장 앞에 서서 우리의 행동을 살피고 있다.
잡화상 주인은 극장 맞은편에있는 네가(치하) 농업협동조합으로 우리를 안내하여 그곳 사무원에게 택시를 불러주도록 청한다. 사무원이 가라쓰의 쇼오와(소화) 택시에 전화를 걸었다. 그랬는데 택시보다 먼저 경찰이 왔다. 가까운 지서원들인 듯해 우리는 기동선 고장으로 상륙했다고 우기며 신분을 말하지 않았다. 얼마쯤 지나 택시가 오고 바로 뒤따라 니시가라쓰경찰서의 경찰차가 왔다.
경찰대를 인솔하고 온 책임자가 경비과장 「우찌야마」(내산화견)란다. 경찰서 과장이라기에 나도 더이상 거짓말해야 소용없을 것이므로 신분을 밝혔다. 나는 한일회담대표로 내왕하던때 갖고 있던 여권을 내보였다.
『망명을 요청하기 위해 일본에 밀항했다. 기자나 기타 다른 사람에게 당분간 내 신분이 밝혀지지 않도록 조처해 달라』고 나는 말했다. 그 말을 듣더니 그는 이것저것 묻지 않고 자동차에 태워 니시가라쓰경찰서로 향했다.
서울에서 내가 일본으로 밀항했거나 할 것으로 보고 수배했다는 뉴스를 듣고 일본경찰도 나의 밀항에 대비해 해안경비를 강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동차안에서 들었다.
니시가라쓰 경찰서에 도착하니 새벽 2시다. 경찰서에서 라면을 시켜다주어 먹었다. 14일 하오5시 다대포앞바다의 돌섬에서 김밥을 먹은후 33시간만에 먹어보는 식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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