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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등 유고모아 『낙하생전집』3권 펴내 한문학연구회|조선조말기의 대표적 "지생" 이학규의 생애 재조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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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묻혀있던 한 인물의 전모를 드러는내 작업이 마무리됐다. 낙하생 이학규 (1770∼1835년).
한국한문학연구회(회장 이우성)는 국내외에 흩어져있던 그의 유고를 모아 『낙하생전집』(전3권)을 펴냈다 (아세아 문화사간). 시집 『춘성당집』등 28권의 저작물을 담았다. 원고의 상당부분은 일본당에나가있었다.
낙하생의 일생을 추적한 임형택교수 (성균관대·한문학)는 『그가 다산 정약용(1762∼1836년) 과 함께 당대 대표적인 지성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억압으로 가장 억울하게 살다간 인물』 이라고 말했다.
낙하생은 자기 생애의 가장 소중한 기간인 24년동안 귀양살이를 해야했다. 다산의유배 18년보다도 6년이 더길다. 귀양이 풀려 돌아왔으나 이미 집안은 몰락해 마음붙일 자리도 없이 노구를 이끌고 방황하다가 충주지방의 어느 시골구석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낙하생은 장서1천권외 학자집안에서 태어났다. 다산의 매부인 이승훈이 삼종숙이고 성호 이익의 조카인 이용휴가 외조, 이가환이 외숙이다.
성호학통속에서 뼈대가 굵었다. 18세때 국왕의 특명으로 규장각의 도서편찬사업에 참여해 정조로부터 『천재로다!』라는 탄복의 소리를 들었다. 그로부터 반대당의 질시와 주목을 받는 대상이 됐다.
정조의 죽음과 순조의 즉위는 엄청난 상황의 변화를 가져왔다.
임교수는 『역사의 전진을 막기 위해선 세도정권이 필요했고 세도정치를 등장시키기위해선 정치적 희생물이 필요했으며 1801년의 신유옥사가 바로 그것』 이라고 말했다. 이단을 숙청한다는 명분아래 천주교도로 몰아쳤지만 요는 반대세력과 진보적사상조류를 뿌리뽑기 위한 조처였다는 것이다.
이승훈·치훈형제가 처단되고 이가환도 혹폭한 고문으로 죽고 다산이 유배당하는 마당에 낙하생 또한 이 화강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이들과 한패라는 이유로 귀양을 떠난지 4년째되는해 어린자식이 죽었다는 기별을 듣고 15년이 되는 해에 부인의 부음을 받았다. 아직 입조도 하지 않은 한낱 포의에 지나지 않은 그가 반동적 정치집단의 주목의 대상이돼 박해를 받은 것이다.
낙하생은 8연장인 다산을 가장 존경하는 선배로 모셨다. 그가 처음 전라도 능주로 유배됐을때 다산은 경상도 장형로, 다시 경상도 김해로 바뀌었을때 다산은 전라도 강진으로, 영호남 사이를 공교릅게 엇갈려 서로 만나지 못했다. 당대 이나라의대표적 지성이 이처럼 국토의 동서 양 남단에 각각 몸이 묶이어 신음하고 있었던것이다.
다산이 유배18년동안 치열한 연구·저술로 거대한 정신노동의 결실을 거둔 반면 낙하생은 이에 따르지 못했다. 그는 이점에 적이 허전함을 느낀바 있다. 그러나 이는 유배생활에서 각기 처해졌던 상황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임교수는 『김해땅이 당시 워낙 문화적 주변부에 속해서 도저히 학문을 지속할 여건이 되지 못했을것』이라고 말했다.
낙하생이 그렇게 부러워마지 않았던바 다산이 다산초당에서 제자들과 둘러앉아 수천권의 장서를 뒤적이며 연구할수 있었던 분위기가 김해의 그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스스로 고백한대로 다정다감한 그의 고뇌·울분은 그대신 시작에 연결되었다.
한 천재의 창조적 역량과 정열이 학문연구에의 환경을 얻지 못하고 대신 문예의 창작으로 분출된것이다.
낙하생이 다산의 시성과에 진일보한 경지를 보이고 있다고 평한 임교수는 『그의 시작은 항상 자신이 처한 현장과 밀착되면서 일정한 민중성을 확보하고있다』 고 말했다.
금년은 낙하생 서거 1백50년이 되는해. 울분과 고뇌에서 쓰여진 유고가 이제야 햇빛을 보게된 것은 참으로 애석하면서도 다행스런 일이라고 학자들은 지적했다. <이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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