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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6)제83화 장경근일기-본지 독점게재(17)-"밀항선을 타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60년11윌5일>
나는 망명을 결심했다. 국내에 몸을 숨기는 것이 병자인 내겐 수월한 길이지만 장기간의 은신은 불가능하고 숨겨주는 이에게 무한한 괴로움을 준다. 망명도 실패할 가능성이 많다. 무역선은 당국의 감시가 엄해 불가능하다. 길은 일본으로 밀항하는 것뿐이다. 그 경우 부산이나 여수로 기차를 타고 가야하는데 내 얼굴이 알려져 있어 어렵다. 그렇지만 다른 선택은 없다.
이병균군에게 밀항 결심을 말하고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이군은 지난해7월 제대할때까지 마산 헌병대장을 해 밀항 루트를 알듯했다.
이군은 부산의 밀항선 루트는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고 얼마전에 대마도에 다녀온 일도 있다면서 부산에 내려가 알아보겠다고 했다. 뜻밖에도 이군은 자기도 밀항선을 함께 타겠다고 했다.
나는 이군에게 다소 비용이 더 들더라도 나와 만순, 그리고 이군 셋이만 밀항선을 전세낼수 있도록 해보라고 일렀다.
밀항선을 모지(문사)항에서 가까운 오꾸라(소창) 해안에 대도록 하라. 내가 병중이어서 걷기가 어려우니 가능한대로 상륙이 수월하고 도오꾜행 열차에 오르기 쉬운 지점에 대도록해야하는데 내가 아는 바로는 오꾸라해안이 제일 낫다고 구체적인 것까지 일러주었다.
방에는 만순이와 망명을 위한 여러일들을 의논했다. 우리 내외가 망명한 후의 아이들의 생활문제, 일본에 가서 셋이 얼마동안 지낼수 있는 생활비 문제등 어려운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우리는 남아있을 가족과 친지들이 나의 망명과 관련해 형사소추를 받지 않도록 하기위해 망명준비는 셋이서만 할뿐 다른 누구에게도 비밀로 하기로하고 떠나는날 아이들과 정덕균비서, 병량누님에게 편지를 남기기로 했다.

<◇60년11윌10일>
이병균군이 부산서 돌아와 밀항선을 구했다고 말했다. 출발지는 부산 다대포. 일요일인 11월13일 하오6시 다대포를 떠나 다음날 저녁 후꾸오까(복강)현 오꾸라해안에 닿는다. 배는 일본제소형 운반선으로 속도가 빠르고 신품이어서 성능도 믿을 수 있다.
세사람은 양복차림으로 어두워진 뒤에 상륙한다. 전세료는 1인 20만환씩으로 하고 계약금으로 절반을 지불했으며 나머지는 일본해안에 도착해 지불한다.
생각 했던 것보다 쉽게 밀항선을 주선한 것이 놀랍다. 일요일 저녁출발은 우리에게는 필수조건이다. 법원은 토요일 오후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의사의 진료가 없고 간호원의 내왕도 뜸하다. 이 40여 시간의 공백사이에 나는 병원을 탈출해 밀항선에 올라야한다.
끝내 내가 망명객이 된다… 만순은 내게 망명할 것을 울면서 호소했다. 바깥소식은 불길한것 뿐이라고 했다. 민주당간부들과 친분이 두터운 허영숙여사(춘원 이광수씨부인)도 민주당의 혁명처리 계획에는 나를 비롯한 자유당관계자 몇사람에 대한 보복적인 가혹처벌 방침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내가 망명하는 것은 결코 민주당의 보복을 두러워해서가 아니다.
나를 몰아내는 것은 소급입법이다. 소급입법을 강요하는 민의는 진정한 다수는 아니다. 강하고 책임 있는 정부라면 나의 책임에서 도망칠 생각은 없다. 맘내키지 않는 망명이기에 나를 합리화 해보는 부질없는 푸념인가.
윤호와 함께 문병 왔던 김정구·권병기군이 생각난다. 일선에서 휴가 나온 여가에 나를 찾은 젊은이들이다. 이 젊은이들 세대가 나를 이해하는 성숙된 정치를 이룩할수 있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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